실프 :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은 1808년 새해를 맞은 왕국을 축복하듯 온누리에 새하얀 눈이 내리던 날이었어.

 

 


순결한 눈으로 뒤덮인 거리는 저마다의 사정을 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걸음소리로 북새통을 이룬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얼굴에는 제각각의 희망이 부풀어 있다.
장을 보는 아낙들은 이웃을 만나 안부를 겸한 수다를 떨기 바빴고, 두품하게 차려 입은 어린아이들은 서로 질세라 괴성을 질러가며 마을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다시금 눈이 내릴 것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도,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꺼뜨리지는 못했다.
지금은 바야흐로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는 1월 초.
매년 1월 1일, 나라의 건국을 기리고 신께 감사를 올리던 왕국의 공식 행사는 몇 백 년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원래의 의미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망토를 둘렀다.
한 때 건국제라 불리며 수확제와 함께 일반 백성들에게 성을 개방하던 풍습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신년 축제라 불리는 뉴페이스가 등장한 것이다.
올 한 해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있도록 신계 감사를 올리는 풍습은 그대로지만, 신년 축제에는 건국제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특별한 행사를 연다.
1600년대 수확제에서 심사했던, 가장 기품어린 매력을 가진 여성에게 내리던 태양신상을 신년 축제로 옮겨온 것이다.
한 해의 풍작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는 수확제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측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수확제의 주요 행사 중 하나였던 미스 왕국 콘테스트는 기품과 매력 부문으로 각각 나뉘어 신년 축제와 벚꽃 축제의 주요 공식 행사로 규정되었다.
그와 더불어, 기품을 상징하는 태양신상을 목적으로 축제에 참가하는 레이디들을 배려하기 위해 본디 4월이었던 사교계 시즌을 신년축제일에 맞추어 1월로 앞당기고, 그 덕분에 왕국의 레이디들은 신년 축제에 참가함으로써 사교계에 데뷔할 초석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자리 잡았다.
마을에서는 백성들이 새해를 축복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고, 성에서는 축제를 통해 자신을 어필하려는 레이디들과 신붓감을 찾기 위해 매의 눈으로 축제를 관전하는 신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내노라하는 귀족에서부터 성과는 별 인연이 없는 평민들끼리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틈에서 나는 홀로 마을을 산책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랴, 댄스 수업 받으랴, 일주일에 한 번씩 음악 교시로가 교회에 얼굴 비추랴, 요 근래 몇 달 동안 이것저것 숙녀로서의 교양을 갖추기 위한 수업을 받느라 나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사실 이번 주도 말카노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댄스 교실에 나가야만 했으나, 신년 축제를 맞아 상급 레이디들을 지도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탓에 며칠 동안 휴강 공지가 내려졌기 때문에, 덕분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나는 맘 편히 마을을 거닐 수 있었던 것이다.
혼자 다니기 심심하니 우즈를 데리고 나올까 싶었지만, 요정은 눈의 여신이 내쉬는 한숨에 특히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다, 본인도 내켜하지 않는 걸 억지로 끌고 나와 봤자 별 수 없어서 나는 호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싸늘한 서리의 기운을 받아 흩어지는 종소리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상인들의 구수한 목소리, 가도 곳곳에 쌓인 눈을 던지며 뛰어노는 어린이들, 험상궂은 3인조에 둘러 싸여 있는 낯익은 얼굴, 괜스레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고픈 욕망을 끌어내게끔 만드는 닭살 커플, 가게의 과일을 물색한다는 명목으로 점원 아가씨와 한창 수다를 떨고 있는 아주머니 등으로 오후의 거리는 한겨울 치고는 제법 붐비고 있었다.
오후의 해가 중천에 떠서 그 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한기의 은총을 받은 추위의 맹위에 대항하지 못한 채 한 풀 꺾여...
......응......?
-험상궂은 3인조에 둘러싸여 있는 낯익은 얼굴?

"수잔?!"

무심코 나는 험상궂은 3인조에 둘러싸인 여자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척 하고 그쪽을 가리켰다.
일제히 사내들이 돌아본다.
적의를 품은 3쌍의 눈. 그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은 잔뜩 겁을 먹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연약한 눈동자 1쌍.

"어이, 지금 뭐라 그랬지?"

사내 중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입고 있는 옷은 평범한 것. 셋 다 근육질의 덩치 큰 모습에 위협을 가할 요량이었는지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살기와도 같은 불온한 공기를 발산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쫄아 줄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저런 아무래도 좋은 녀석들에게 신경 쓰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내게 뭐라고 말을 거는 사내를 가뿐히 무시하고, 나는 그들을 밀치고 오들오들 떠는 소녀에게로 달려갔다.

"수잔,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 사람들은 다 뭐고?"

나는 걱정스런 어조로 눈앞의 소녀 - 이따금 보모 알바를 하러 보육원에 드나들었을 때 마치 내가 프린세스 같다며 집오리 새끼마냥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언니...! 무서워!"

아는 얼굴을 보고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수잔은 내 품에 달려들었다.
나는 수잔의 등을 토닥이며 확- 방금까지 이 아이를 에워쌌던 사내들을 째려보았다.

"이봐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남자 여럿이 어린애 하나를 둘러싸고 협박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아요?"

"뭣이라고?!"

"어이어이, 아가씨. 누군진 모르겠지만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냐."

흥분하여 달려들려는 사내를 제지하며 다른 사람이 타이르듯 말을 걸었다.

"우린 그저 한눈팔다 남에게 부딪혀 놓고 사과 한 마디로 입 닦으려는 건방진 꼬마에게 충고해 주려는 것뿐이었다고.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사람을 악당 취급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별 시답잖은 핑계를 지껄인다.
-남에게 시비 거는 놈들은 항상 이런 레퍼토리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이 남자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이제 와서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그래도 1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저 만만한 사람이 걸리길 기다려 시비를 걸고, 3:1이라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 되도 않는 공갈을 칠 셈이라는 걸.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일단 몸가짐은 깔끔하지만 척 보기에도 성질 급할 것 같은 분위기를 온 몸으로 발산하는 사람들한테 일부러 돌진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 말대로 한눈을 팔다 실수로 부딪혔든, 자기네들이 다가와 부딪히고 생사람을 잡는 것이든... 어린 애를 상대로 저런 말을 지껄인다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은 거지만.

"그래서, 어린애가 모르고 저지른 실수를 어른의 아량으로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되도 않는 트집을 잡아 한 밑천 챙겨보겠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여럿이서 한 명한테, 그것도 어린애한테 득달같이 달려들어 겁을 주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나는 척 하고 사정이랍시고 지껄인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내세워 호통 쳤다.
-허리에 수잔이 울며 매달리고 있어서 별로 모양은 안 살지만...

"이게...!"

사내들의 안색이 바뀐다.
핵심을 찔려 흥분한 것인지 기세등등한 살기마저 감돈다.
아는 동생이 곤경에 빠져 있는 걸 모른 척 할 수 없어 일단 나서긴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랑 수잔, 꽤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 아...냐?
소란을 피운 덕에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지만 서로 수근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려는 기색이 없었다.

"한 수 굽혀주니까 건방지게 기어올라! 아무래도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군!

삼류 악당이나 내뱉을 만한 흔해빠진 대사를 읊는다. 그것보다...
-댁들이 대체 언제 한 수 굽혀줬다는 거야?
아무래도 화를 돋울 것 같아서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하고 속으로만 따지는 나.
이럴 때 아리엘이 있었다면 그녀 나름의 방식대로 끝장을 내줬겠지만...
거칠게 뻗어오는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면서도 나는 팔을 휘저어 나에게 매달려 있는 어린 천사를 감쌌고-
바로 그 때.

"그 정도로 해 두지 그래."

제3자가 개입하는 소리가 났다.
모두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서 있는 한 남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진한 금발에, 5월의 탄생을 빛내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한 쌍.
따로 갑옷이나 무기를 장비한 것은 아니지만, 도중에 끼어든 이 남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사내들마저 움찔하게 만들 만큼 기묘한 박력을 방출하고 있었다.

"이것 봐, 형씨들.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여자를 붙들고 협박이라니. 몰상식한 수준에도 정도란 게 있는 거야."

아까 내가 했든 말을 살짝 바꿔 다시 들려준다.

"시끄럽다! 갑자기 튀어 나와선, 넌 대체 뭐하는 자식이야?"

순간 남자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 모습은 흡사 - 궁지에 몰린 쥐가 마지막 발악으로 자신에게 달겨드는 걸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는 고양이 같았다.
...아니, 딱히 저 남자가 고양이 상이라는 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 알지?
아까와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려는 듯, 흥분해 달려들려는 동료를 말렸던 사내가 다시 끼어들기 위해 나서는 제스처를, 이 남자는 손을 들어 막았다.

"구태여 사정 설명할 필요 없어.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으니까. 네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도 말야."

"그러셔? 그럼 얘긴 빠르지. 네 놈부터 손봐주마!"

흥분 잘 하던 사내가 기어이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 가 바로 나가떨어졌다.
물론 저 남자의 승리다.
나는 싸움 같은 건 잘 몰라서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달려드는 사내의 움직임을 필요최소한의 몸짓으로 피해낸 뒤 건달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고, 그 다음 순간 달려들었던 건달은 끄으으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엎어진 것처럼 보였다.

"댁들도 싸울래?"

싱글거리며 쉭쉭 주먹을 내지르는 남자의 질문에, 적어도 뒤에 서 있던 두 사내는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모양이었는지 눈을 부라려 우리들을 한 번 쏘아보고는, 땅에 엎어져 강제로 숙면 중인 동료를 들쳐 업은 뒤 모여든 구경꾼들을 밀치고 사라졌다.

"그럼..."

출중한 실력으로 나타나 우리들을 구해준 청년은 건달들에게 보였던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나와 수찰에게 다가왔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전, 남자는 쪼그리고 앉아 내게 매달린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꼬마 아가씨. 세상에는 온갖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꼬마 아가씨 같은 어린애들은 혼자서 돌아다니면 안 돼. 부모님이나, 아가씨를 보호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다녀야지."

"나 꼬마 아냐. 여섯 살이야!"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수잔은 볼을 부우 부풀리며 항변했다.

"그래? 미안 미안. 내가 공주님을 몰라 뵈었네. 곧 시집갈 아가씨에게 큰 결례를 범했구나."

남자는 예의 싱글거리는 웃음을 띠며 수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저어,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그에게 감사 의사를 표했다.
내 인사에 그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거두고 일어나 나를 향해 웃었다.

"아니 뭐... 별로 감사받을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닌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쑥스러웠는지 남자는 별 의미 없이 콧잔등을 거칠게 문질렀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해. 자기 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싼 것들로 장식하고 다니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거든."

그의 충고에 나는 무심코 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과연.
나는 그 청년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이 신년 축제라고 멋을 부리고 나온 건 좋았지만, 아까 같은 시비에 휘말릴 경우에는 오히려 독이 될 터.
그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겠어요."

나는 그의 의견에 수긍하여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저어, 구해주신 데 대한 답례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어떠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앞서 나간 혓놀림에 깜짝 놀랐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감사 인사보다는 돈이나 선물로 답례를 하시는 아버지는 절대 닮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나 오늘 왜 이러지?
물론 이 사람의 친절에는 감사하는 바이지만, 차까지 사겠다며 붙들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 쪽에서 먼저 요구했다면 얘긴 다르지만.
그러나 이미 말을 꺼내버린 이상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는 상황.
나는 내 당돌한 제안에 놀라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고개를 가로로 흔들면 나는 한없이 민망한 기분을 맛보게 되겠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께서 직접 제안하셨는데, 남자로서 승낙하지 않는다면 천재일우의 기회를 버리는 게 되겠지?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갈까? 괜찮은 찻집을 아는데."

다행히도 남자는 생긋 웃으며 내 제안을 수락해 주었다.

"맞다. 혹시 또 시비 거는 녀석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 꼬마 아가씨(그는 수잔을 흘깃 바라보았다)부터 먼저 집에 데려다 준 뒤 출발하는 게 어때?"

그는 시원시원한 어조로 모두를 리드하면서 내게 예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듯, 남자의 행동거지는 무심코 감탄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아무래도 성에서 일하게 된다면 아랫사람들 통솔은 기가 막히게 잘 할 것 같은데.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나는 기꺼이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멋대로 정해버렸지만 수잔도 별 말 없는 걸 보니 수긍한다고 봐도 좋겠지.
한 순간이라도 따라오겠다고 떼를 쓰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아무래도 기우로만 끝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