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는 드디어 내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성인이 되는 날에 맞춰 결혼식이라니, 기분이 묘하네요.
남편 될 사람과는 나이차가 좀 있지만 괜찮아요.
분명 잘 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훌륭한 숙녀가 될 수 있도록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왔는걸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프린세스가 되지 못한 건 아쉽네요.
하긴, 어릴 때부터 꿈이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런 기분으로 결혼한다면 아버지에게도, 남편 될 사람에게도 미안한 일이니까.
이런 생각은 오늘 밤 안으로 잊도록 할게요.
그러고 보니 이제 아빠와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군요. 아 참, 우즈도 있었지.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아련한 추억이 되겠죠.
저는 이 편지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아 영원히 봉인하고, 내일부터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살아가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했어요...

-실프의 마지막 편지 중 일부 발췌-

 

 


실프는 정확히 성인이 되던 날, 대부분의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훌쩍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의 뒤에 숨어 실프의 결혼식을 죽 지켜 본 우즈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따끔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8년 간 극진히 모시던 아가씨가 생애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시간. 적어도 그 날만큼은 요정 여왕님마저도 우즈가 따르던 실프의 미모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인들과 친구들이 축하하는 자리에서 신의 가호를 받는 신성한 결혼식.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여서 텁텁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일까.
8년간 동거 동락했던 아가씨를 채간 도둑놈에 대한 질투심? 아니다.
그것은 시집가는 딸을 둔 아버지가 느껴야 하는 심정이지, 한낱 집사에 불과했던 요정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헤어지게 된 데 대한 아쉬움?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렇구나...!"

대체 뭐가 맘에 안 들었던 걸까 고심하던 우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계륵처럼 자신의 목덜미에 달라붙었던 께름칙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가씨와 집사.
요정 여왕님 아래서 태어난 형제.
인간계에서 유일하게 공통분모를 가진 자.
여왕님을 제외한다면, 실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자.
인간계에서 8년을 함께 보냈다.
요정계에서도 근 2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공유했다.
실프의 버릇, 몸짓,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는 바로 우즈 자신.
아버지를 따라 식장으로 들어서던 실프는 분명 웃고 있었다.
눈처럼 하얗고 순결한 웨딩드레스조차도 그녀의 미소를 가리지는 못했다.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우수어린 물안개의 존재마저도.
행복해야 할 결혼식에서 아가씨는 왜 그토록 슬픈 눈을 학 있었을까.
잠시 사이를 두고 고민하던 우즈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요정 여왕님께서 허락해 주실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말이라도 꺼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즈는 침대 대신으로 삼고 있던 이름 모를 들꽃 위에 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켜 날개를 흔들어 위로 솟아올랐다.
요정의 날개에서 하롱하롱 떨어져 내리는 무지개 분말이 아침 이슬에 닿아 영롱한 빛을 띄운다.
실프가 성인이 되어 제 길을 찾은 시점에서 우즈가 더 이상 인간계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씁쓸한 마음을 안고 요정계로 돌아왔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찜찜한 기분에 농락당할 줄은 몰랐다.
여기서 자신의 기분에게서 등을 돌려봤자 언제까지고 가슴에 응어리진 형태로 남아 자신을 괴롭힐 테지.
그럴 바에야, 어떡해서든 여왕님께 허락을 받고 인간계로 날아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허심탄회하게 물어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실프가 대답해 줄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터.
우즈는 힘차게 날아올라 요정계를 다스리는 여왕님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래가 떨어지는 영겁의 소리만이 넓은 방을 지배한다.
압지에 고정된 최고급 양피지에서 고급 독수리 깃펜이 춤추고, 현란한 움직임이 지나간 자리에는 수려한 글씨만이 남는다.
사뿐히 내려앉아 흐느끼는 달빛의 음율을 반주 삼아, 실프는 부지런히 깃펜을 놀려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지만, 동침을 요구하는 남편은 물건 매입을 위해 며칠 전부터 줄곧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다 한들 못마땅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저택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금, 실프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안주인이었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둘까."

마지막 맺음말을 던져 넣고 주욱 기지개를 켠다.
펜을 놀리는 동안 팔에 내려앉은 피로는 그 뿌리를 뻗어 근육에 달라붙어 한데 뭉치게 했지만, 가벼운 기지개 한 방으로 날려버릴 만큼 별 것 아닌 것이었다.
실프는 마지막으로 양피지 안에 갇혀 날뛰는 정갈한 글씨를 대충 훑은 뒤, 가볍게 말아 올려 입구를 봉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하고, 편지는 내일 하녀를 시켜 부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들어 온 하녀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것 같던데, 아무래도 맨디에게 잔소리 좀 해야겠어.
이 방에는 실프 혼자였으므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때문에 볼일을 마치자마자 터져 나오는 하품을 구태여 막지 않는다.
실프는 저택에 고용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신참 메이드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일은 따로 시녀장을 불러 저택 내 하녀들의 기강을 좀 바로 세우라고 명령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느 정도 갈구면 자기가 알아서 아랫것들 단속을 하겠지. 신분과 직위는 내리갈굼을 손수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증거인 셈이니까.
화장대 위에 놓인 나이트캡을 집어 들어 라벤더 색으로 물들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손수 정리하며, 실프는 거울 속에 갇힌 자신의 도플갱어를 주시했다.
특별히 애수에 잠겨서 그런 것은 아니다. 거울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잠자는 동안 피부를 보호할 화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프는 별 생각 없이 화장수를 집어 들어 적당량을 덜어 얼굴에 바르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고-

"...우즈...?"

결혼 전까지 자신을 섬겼던 요정 집사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갈 곳을 잃은 화장수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카펫 위를 흐른다.

"오랜만이에요, 실프 아가씨."

우유 속에 담근 체리빛 머리칼을 한데 모아 위로 올린 꽁지머리.
8년 내내 한결 같았던, 요정 여왕님이 특별히 요정의 날개를 굳혀 만들어준 깔끔한 집사복.
날개짓을 할 때마다 쏟아지는 무지개 분말은 달빛을 받아 한숨을 내쉰다.
아버지를 포함해 셋이서 함께 살 때는 항상 당연한 듯 마주했던 우즈의 모든 것들이, 지금에 와서 눈이 시리도록 두드러지는 것은 결혼 후 엄습하는 외로움에서 파생된 향수 때문일까.

"대체 여긴 어떻게... 언제 들어온 거야, 우즈? 너 요정계로 돌아간 거 아니었니?"

흡사 꿈은 아닐까 싶어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실프가 물었다.
아무래도 빨갛게 부어올라 쿡쿡 쑤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꿈은 아닌 듯 싶다만...
우즈는 8년 내내 변함없이 보여주었던 순박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잠시 여왕님의 허락을 받아서 온 거예요. 아가씨를 뵙고 싶기도 했고... 또 물어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어째서인지 우즈는 뒷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린다.

"물어보고 싶은 거? 뭔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 뭐 그런 게 궁금한 거야?"

"그런 것도 있지만... 저..."

우즈는 손발을 배배 꼬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그 먼 요정계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정도니까 가벼운 일은 아닐 것 같지만...
실프는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우즈가 찾아온 이유를 유추할 수 없었다.

"저기, 우즈. 멀리서 찾아와 준 너한테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한데, 난 지금 자려던 참이었거든. 그러니까 얼른 용건을 말하든지 아니면 나중에 다시 얘기하든지 아무거나 하나 선택하도록 해."

때마침 터져 나오는 하품을 막으며 실프는 말했다.

"저, 저기... 아가씨 얼굴 때문에요...!"

한 순간, 실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얘가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내 얼굴이 궁금하다고? 잘 살고 있는지,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전에 결혼식을 올릴 때 아가씨가 보였던 표정이 줄곧 마음에 걸려서요.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꺼림칙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알고 싶은 마음에..."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여왕님 허락은?"

"물론 받았죠! 사정을 설명하니까 여왕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는걸요!"

실프는 팔짱을 끼고 우즈의 다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속내가 피어오른 페르소나를, 이 요정은 알아챘었단 말인가?
실프의 머리 속에 그림이 피어올랐다.
긴가민가하며 찝찝한 마음을 품고 요정계로 돌아와, 줄곧 신경 쓰다가 결국 호기심을 삭이지 못 하고 인간계까지 찾아 와 당사자의 눈치를 살피며 탐색하는 눈초리가 너무나도 쉽게 떠오른다.
-역시... 8년 동안 동고동락한 경험은 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정계로 돌아가기 전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방문한 것도, 오랫동안 고심했다는 증거.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무덤까지 혼자 떠안고 살아가려 했거늘.
실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나친 생각이라며 미소 짓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먼 거리를 날아든 우즈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잠깐 저기 앉아봐.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해 줄게."

실프는 창가에 놓인 커다란 침대를 가리키며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자리에 우즈가 앉는 것을 기다려 자신도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실프는 기억 속 심연에 푹 가라앉은 '이야기'를 건져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