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녀는... 악마이기도 하고 천사이기도 하다.
요부인 동시에 성녀이기도 하고,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세계를 파멸에서 구할 용사가 될 수도 있다.
내 힘으로는, 이 아이의 운명을 단정 지을 수 없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5년 전, 호기심에 이끌려 처음 점술관에 발을 들였던 내게 점술가가 말했던 예언인지 저주인지 모를 대사의 전문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그냥 웃고 넘길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당연히 저 말을 듣고 잔뜩 겁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고? 내일이면 나는 드디어 사랑하는 그이와 결혼식을 올리고 평범한 행복을 찾게 된다.
용사니 요부니 성녀니 하는 말은 전부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는 쓸모없는 거짓말일 뿐이었다.


2009년 5월 30일, 결혼식을 하루 앞 둔 요코야마 아오이의 일기장에서

 

 


신부 대기실에는 갓 잡은 활어처럼 싱싱한 기운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날의 주인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신부를 보러 드나드는 손님들은 상투적인 축하의 말을 건넨다.
식이 시작할 때까지 꼼짝 않고 이 곳에 대기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갑갑했지만, 관례인 이상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 좋을 터.
한여름에게서 공급받는 열기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꺼내들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을 드나드는 통에 그마저도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좋지만 땀이 흐르는 것만은 피해야 할 텐데. 어렸을 적 가지고 놀았던 인형 코르네처럼 가만히 앉아 전문가들에게 즉석 성형을 받는 일만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예뻐지기 위해선 참을 수밖에 없다는 설도 있지만, 그이가 예쁘다고 말해주는데 대체 무슨 상관이야.
여자의 평생 로망이라는 웨딩드레스도 이제는 별 감흥이 없다.
내 몸을 단단히 옥죄는 코르셋을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식을 끝낼 때까지는 얌전히 참고 있는 수밖에.
소녀들의 로망을 정중하게 부숴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곧 시작될 예식에 그의 손을 잡고 식장에 동반 입장하는 상상을 떠올리며 행복해 했다.
변덕이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결혼식이란 건 모두의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생을 맹세하는 숭고한 약속이니까.

"여, 아오이!"

내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며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리고 카메라를 든 에미링과 히로코, 미치루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뭐야, 니들. 왜 이렇게 늦었니?"

"미안미안. 켄꼬맹이가 길을 헤매는 바람에 그만. 그래서 내가 좀 돌아가더라도 내비게이션을 따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는데도 안 듣더니."

미치루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아사쿠라는?"

"지하에. 주차 중이거든. 길눈 어두운 거야 둘째 치고, 면허 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의외로 운전 실력 좋더라. 미치루 아버지께 빌린 차만 아니었다면 좀 더 과감하게 몰았을지도 몰라."

여자가 셋 이상 모였으니 이제 곳 이곳에서 수다판이 벌어질 거라는 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을 거다.
아사쿠라도 온다는 의외의 소식에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지만, 뭐 상관없어.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까, 신경쓰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럽지.

"그나저나 여기서 널 보니까 난 도저히 결혼은 못 하겠다 싶어."

에미링 뉴스에 싣겠다며 내게 여러 포즈를 강요하곤 본인을 비롯해 히로코와 미치루까지 끌어들여 용량이 초과될 때까지 디카를 누르던 에미링이 만족한 듯 물러나자마자 미치루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툭 하고 내뱉었다.

"왜, 상대가 없어서?"

"아니, 꼭 그렇다기보단... 저것처럼(미치루는 내 드레스를 가리켰다) 꽉 끼는 옷을 입고 몇 시간이나 대기해야 한다는 게 한없이 갑갑할 것 같아서."

아, 그렇구나.
난 미치루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활동적인 미치루가 늘 선택하는 옷은 기동성을 중시하는 스포티한 옷.
여자가 멋 부릴 수 있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다며 치마 같은 걸 권해도 불편하다면서 항상 바지만 고집하던 그녀라도, 결혼식장에서까지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는지 노란색과 오렌지 빛이 섞인 정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치루가 교복 말고 치마를 입은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네.
그 원피스마저도 미치루에게는 상당히 갑갑한 모양이다. 그리고 웨딩드레스는 저 원피스보다 몇 갑절은 허리를 옥죌 테니까 저리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야.

"그래, 미치루한테는 그것도 고역일 거야."

미치루의 의중을 알아차린 게 나만은 아닌 듯, 에미링이 키득거리며 말을 받았다.

"아까 보니까 아오이네 어머님이랑 집사 씨랑, 쿠로다랑 아야도 손님 맞느라 정신없어 보이더라.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그 정도는 용서해 주시겠지?"

"그것보다 깜짝 놀랐어. 너희가 이렇게나 빨리 결혼하게 될 줄이야... 결혼은 너 대학 졸업하고 나서 올릴 거라고 말해 놓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니?"

"아, 그거..."

나는 말끝을 흐렸다. 한순간 말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친구들이니까 상관없겠지?

"사정이 있었어. 일생에 한번 뿐인 캠퍼스 라이프를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자, 친구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반짝 하고 눈을 빛냈다.

"그래? 대체 무슨 사정인데?"

"얼른 말해. 궁금해 돌아가시겠다."

"흐음..."

나는 짐짓 뜸을 들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거창하게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별 거 아니다. 대단해 보이는 마술이라도 트릭을 공개하면 김이 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사정이냐면... 그가 내게 프러포즈를 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닥친 변화를 제일 먼저 접한 그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결혼해 달라고 말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받아들인, 단지 그 뿐인 이야기.
그래, 그는 내게 프러포즈하면서 분명 이렇게 말했다...

 

 


"어, 히토시. 생각보다 빨리 왔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집 밖으로 나온 나는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히토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여어."

히토시는 한 손을 드는 것으로 내 말에 반응했다.
혹시 며칠 전 내가 그에게 알렸던 소식 때문일까, 왠지 그의 얼굴이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집 앞에서 기다리기까지 하고... 평소 히토시답지 않네... 오늘은 어디로 갈 거야?"

내가 괜히 착각한 것이겠지, 라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 어떻게 확실히 결론이 난 것도 아닌데,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잖아.

"...저기."

"응? 왜? 어디 갈지 정했어? 아니면 내가 정하면 되는 거야?"

낮에 데이트할 때마다 항상 코스는 내가 고르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어디가 좋을까 고심하려던 때.

"...아무것도 아냐. 가자!"

그가 별안간 내 손을 쥐고 어딘가로 이끌기 시작했다.

"자, 잠깐! 어디로 가려는 건데?"

"와 보면 알아."

설명이라도 하면 큰일 나기라도 하나. 히토시는 저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닫았다. 에휴, 별 수 없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그 대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아~ 여기! 우리가 처음 데이트했던 공원이네!"

난 바로 정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맞아! 저기 저 벤치에서 문어빵을 먹었었지... 혹시 기억해?"

"응..."

나는 히토시와 첫 데이트를 즐겼던 옛 추억을 그리운 듯 말했다.
운 좋게 아이들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공원에 갔고, 반쯤 페인트가 벗겨진 벤치에 앉아 소스 냄새가 일품인 문어빵을 사다 먹던 중 느닷없이 히토시의 우렁찬 굉음과도 같은 고백을 들었고...
몇 년이나 지난 오래된 추억이지만 그 하나하나는 황금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들이었다. 절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을 만큼.

"그러고 보니 밤 공원은 낮하고는 다르게 조용한 게 신기한 느낌이야. 아무도 없고..."

항상 아이들이 뛰놀던 소리로 북적이던 공원은 어둠이 내려앉으면 침묵을 지킨다.
옛 추억에 발목이 잡힌 나는 그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있지, 히토시. 모처럼이니까 조금 뛰놀지 않을래? 아무도 없으니까 부끄러워 할 필요 없지?"

"응..."

나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네로 종종종 달려갔다.

"이거 봐, 히토시. 이 그네 아직도 그대로야. 정말 오랜만이다. 2개니까 같이 탈래?"

그네를 매단 사슬을 쓰다듬던 나는 냉큼 한 자리를 차지했다. 양 손에 달라붙는 차가운 철의 단단한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았다.

"어?"

갑자기 내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인식한 내가 고개를 들었다.

"저, 히토시? 그렇게 다가오면 위험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토시는 내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철컹.
내가 탄 그네의 줄을 잡아 조금씩 흔들리는 그네를 거칠게 멈춰 세웠다.

"......?"

나는 물음표 부호를 띄운 채 그를 쳐다보았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물으려던 찰나-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돌연 그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히토시?!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완전히 허를 찔린 나는 그네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결혼해 줘!"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뭐...?!"

나는 되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오히려 나는 그가 내뱉은 한 마디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오이!"

"으, 응!"

기합이 가득 찬 목소리가 내 이름을 올리자, 덩달아 소리치는 나.
히토시는 말했다. 거리가 떠나갈 만큼,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나하고 결혼해 줘!"

-이, 이건... 프러포즈...?!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알기 쉬운 방식으로 표현해 준 덕분에 이해하기는 쉬웠지만, 그래도 얼떨떨한 건 매한가지.
아니, 안 돼. 내가 지금 여기서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양쪽 뺨을 때려 기합을 넣었다. 앞으로도 힘들 일이 많을 텐데 겨우 이런 일에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니까.

"고마워, 히토시. 먼저 말해 줘서."

칠흑과도 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서 다행이다. 덕분에 얼굴에 홍조가 깃든 걸 들키지 않을 것 같아.

"...결혼하자."

나는 그가 내게 건넨 제안을 되풀이함으로써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정말... 나라도 괜찮은 거지? 다른 녀석이 아니라... 나만 바라보겠다고 약속한 거다?"

"응, 그래. 약속해. 평생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너 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겠니. 심정적으로도 그럴 수는 없었고, 게다가... 너와 나의 작은 생명에게도 못할 짓이잖아...
마지막 말은 마음 속 깊숙이 감추어 둔다. 하지만 그래도, 그라면 눈치 채 주겠지.
이 작은 생명의 존재는 나와 히토시밖에 모르니까. 아직까진.

"우오오오오오! 해냈다!!!! 해냈다고!!!!!"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인지, 히토시는 난데없이 괴성을 지르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히토시도 참... 이러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겠어."

나는 살짝 눈을 흘겼지만, 답답할 만큼 꽉 끌어안았으니 보일 리가 없으려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연거푸 괴성을 지르는 그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그에게 사실을 고백한 이후로 마음 한 구석을 내밀히 짓누르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의 성품을 의심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안했었어. 혹여라도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하고.
뭐, 이렇게 기우로 끝났으니 이젠 신경 쓸 필요 없지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설렌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하늘에라도 오를 만큼 가벼운 기분을 느끼며, 나는 이제 모든 사실을 어떻게 어머니께 고백해야할지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세 여자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음, 뭐랄까... 프러포즈하는 방식이 참... 쿠로다답다고 할지... 그렇지?"

미치루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리 지르는 부분은 좀 그렇지만 나쁘진 않네. 박력도 있고. 뭣보다 책임감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 맞아, 남자라면 그래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치루 너 실은 안심한 거지?"

뭔가 납득한 듯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미치루 옆에서 에미링이 장난스런 어조로 끼어들었다.

"아, 안심이라니 무슨 소리야?"

재미있을 만큼 얼굴을 붉히며 따지는 미치루. 그 반응은 에미링의 추측을 긍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에미링은 작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미치루를 공격했다.

"이 상황에서 뭘 빼고 그러실까. 이제 아오이는 완벽하게 품절이 됐으니, 아사쿠라도 완전히 미련을 버릴 테니 당연히 안심이 되지 않겠어?"

"뭐어어어어엇?!"

에미링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제외한 세 사람의 비명소리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히로코는 순수한 당혹감, 나와 미치루는 비밀을 들킨 데 대한 당혹감이라는 게 다르지만.

"그, 그걸 어떻게... 그럼 너, 아사쿠라가 나한테 고백했다 차였던 것도 알고 있었던 거야?"

에미링을 쳐다보느라 거울을 볼 수 없는 탓에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아마 허를 찔린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비밀이란 것은 별 것 아니다. 히토시와 사귀기로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얄궂게도 아사쿠라가 내게 고백을 해 왔고, 이미 애인이 생긴 나는 그 사유를 들어 고백을 거절했다.
미치루야 아사쿠라와 소꿉친구나 알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어째서 에미링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지? 혹시... 숨어서 보고 있었던 거 아니야...?
에미링은 짓궂게 씨익 웃음을 흘렸다.

"에미링 뉴스의 편집장을 우습게 보면 곤란하지. 내가 괜히 마당발이라고 소문이 났겠니. 언제였더라... 아마 아오이가 아사쿠라를 찬 직후겠지? 아사쿠라가 쿠로다를 죽일 듯 노려보던 시점에서 바로 눈치 챘지. 사실 둘 다 굉장히 알기 쉬운 성격이기도 하고 말야."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옛 말이 맞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타이밍 좋게 정장을 좍 빼 입은 아사쿠라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양반은 못 된다니까.

"야, 켄꼬맹이. 주차하는데 뭐 이리 오래 걸렸어? 설마 주차장에서도 길을 잃었던 건 아니겠지!"

에미링의 마수에서 빠져나갈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재빨리 그에게 말을 거는 미치루.

"야, 나 그렇게까지 길치 아니야! 남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자리 찾느라 연거푸 몇 바퀴를 도느라 그랬을 뿐이라고."

"엄마가 글 쓰시는 직업을 가지고 계시다보니, 동료 작가 분들과 출판 관련 업계 손님들이 많이 오셔서 공간이 넉넉지 않아서 그랬을 거야. 미안."

여기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또 둘이 싸울 것만 같아 재빨리 중재에 나서는 나.

"아, 아니야.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사과하지 마."

아사쿠라는 양손을 내저으며 내가 고개 숙이는 것을 마다했고, 잠시 시간을 두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너 진짜... 예쁘다. 오늘의 주인공다워."

"응... 고마워, 아사쿠라. 축하하러 와 줘서."

나는 품위 있게 그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아쉬워하나 싶어 살짝 그의 얼굴을 훔쳐봤지만, 적어도 내게 보기에는 그의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하긴,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까지 마음에 둘 리는 없겠지.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미치루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가는 게 기정사실이 된 만큼 그녀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셈이니... 잘해 봐, 미치루.

"아가씨, 곧 예식이 시작도리 테니까 준비해 주세요. 친구 분들은 먼저 식장으로 가주십시오."

큐브의 노란 눈이 불쑥 고개를 들고, 시간이 다 됐음을 알린다.
조금 있다 식장에서 보자는 인사를 남긴 채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하나 둘 퇴장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나는 곧 나를 데려올 신랑을 기다리며 곧 빛나게 될 나의 왼손 약지를 주시했다.
보란 듯이 데리고 잘 살 것이라고, 나는 몇 번이고 다짐한 내용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고,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런 걸 두고 천생연분이라 부를까?
나는 은은한 미소를 품으며 히토시가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내가 좀 더 성숙해지고, 세상이 생각보다 만만찮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