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의 꿈.
나는 꿈속에서 수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화내거나 울거나 웃거나 하고 있었다.
그 후로 중학교에 진학하여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또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했다.
길고 긴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른이 되어 왕자님의 청혼을 받아 프린세스가 되었다.
역시 나에게도 이런 꿈같은 기회가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아직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갓난아기의 목 놓아 우는 울음소리에 잠을 깨어, 눈을 뜨면서 살짝 그렇게 생각했다.

2018년 5월 31일, 요코야마 아오이의 독백에서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것 같다. 나는 묵묵히 문을 열고 나의 어린 시절을 가두었던 옛집의 문을 열었다.
이 시간대라면 아마 어머니는 출판사에 계실 테고, 큐브는... 시장이라도 간 걸까? 하긴, 몇 시까지 돌아갈 거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옷, 신발, 장신구, 패물, 기타 내 소유의 생활용품을 들고 어머니와 큐브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지긋지긋한 법정 절차를 거쳐 기어이 법원으로부터 이혼 판결을 받아낸 뒤였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켜 머리가 다 아프다.
집이 조용한 걸 보아하니 미노루도 료타도 아직 자고 있는 걸까.
일단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를 한 모금, 문득 눈에 띈 쇼트케이크를 꺼내려다가 익숙한 데코레이션을 깨닫고 뻗었던 손을 거둔다.
법원을 나오면서 내 평생 빵과 케이크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달콤함에 끌려 또 손을 뻗으려 하다니, 아무래도 잠시 미쳤었나 보다.
다 마신 우유를 내던지듯 싱크대에 내려놓고, 나는 널찍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팔을 주욱 뻗는다.
기지개와 함께 피곤이 빠져나가 묘하게 마음이 안정된다.
아니, 안정감을 느끼는 건 10년간 나를 얽매던 속박으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일까.
자세를 바꿔 옆으로 드러누우며 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10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지...
특히, 나와 그가 법원까지 가서 진흙탕 싸움을 펼치게 된 '그 사건'은 정말이지 끔찍했어.
하객들 앞에서 영원을 노래한 그 맹세가 10년 만에 깨질 거라고는, 그 당시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
이야기는 그로부터 석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쨍그랑!
내가 뒤를 돌아보기 무섭게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찢는다.

"......."

나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표정을 조금이라도 감추고자 얼굴에 손을 가져가는 나.
뭐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거고, 아이는 어른에 비해 특히 더 주의가 산만한 만큼 곱절로 사고를 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리나! 엄마가 사고 치지 말랬지? 미나도 리나 놀리지 말고! 마사오! 밟으면 위험하니까 저리 가 있어. 집안에서 뛰지 말고!"

등에는 갓난아이를 업고, 쉼 없이 팔을 움직여 유리 파편들을 치우면서도 나의 두 눈을 팽글팽글 돌면서 아이들이 또 사고를 치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있어야만 했다.
정신없지만 어쩌겠어. 힘들단 이유로 하나라도 내팽개쳤다가 애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니, 내가 좀 고생하더라도 두 눈 부릅뜨고 있어야지.

"에구구..."

겨우 쓰레기를 처리하고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고 스트레칭을 두어 번.
목인지 허리인지에서 뚜둑 하고 소리가 나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나는 뒤로 팔을 뻗어 등에 업힌 막내 미노루를 살짝 들어 올려 자세를 고쳤다. 깨어나 울지 않고 자는 모습이 정말 대견하다.
그래, 사실 이런 맛에 애들을 키우는 거겠지.
아이들의 미소, 그것이 고된 육아로부터 부모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거실 소파를 독차지한 채 코를 고는 남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찍이 진학에 뜻을 두었던 나는 바로 대학에 입학했고,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히토시는 별 고민 없이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가업을 이어 아버님의 제과점을 물려받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는 지나가듯 슬쩍 흘린 내 의견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죽어도 아버님의 뒤를 이을 생각은 없다나.
그럼 무슨 일을 할 것이냐고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틈틈이 알바를 했던 경비 회사에 취직하겠다고. 마침 사장님께서 정직원으로 입사 제의를 하셨다고 한다.
히토시에게 딱 맞는 일이라고 격려했던 기억이 난다.
난 그대로 대학에 진학했고, 히토시는 경비회사에 취직하여 각자의 길을 걸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하자고 서로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어린 생명이 우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며칠을 뜬 눈으로 고민하다 겨우 히토시에게 사실을 알렸고, 그가 프러포즈를 해주어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서둘러 식을 올렸다.
1년 정도 휴학하여 아이를 낳고 복학할 예정이었지만...(학교에 가 있는 동안 아이는 미안하지만 큐브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내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며, 서로의 욕구를 자제하고 조심하자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봤지만 히토시는 요지부동이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결혼까지 한 부부 사이에 어째서 서로의 욕망을 억누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반발(?)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목조목 근거를 들었다.
현재 우리가 놓인 상황, 양가의 위치와 부담, 부모로서의 의무 등등.
그 점에 대해서는 그도 동의했다. 하지만 오히려 히토시는 내가 제시한 물리적인 방법 대신 자연적인 방법을 쓰자며 도리어 나를 설득했고... 뭐어, 내가 그 주장에 넘어간 건 부정하지 않아.
솔직히...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나도 굳이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뒷이야기는... 말 안 해도 짐작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복학한 지 1년 만에 우리는 또다시 준비되지 않은 생명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고, 학업을 위해 한순간이나마 지우는 쪽을 고려하던 나를 매정한 엄마라고 비난하며 히토시는 어떻게든 낳아 키우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 자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전업주부로 방향을 틀었다.
10살짜리 소녀를 돌본 적은 있어도,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본 경험은 전무한 큐브로서는 신생아를 돌보는 것이 상당한 고역이었을 것이고, 설상가상으로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여아 일란성 쌍둥이.
아무리 양심에 털이 나도 그렇지, 영아 셋을 한꺼번에 돌보라는 부탁은 얼굴에 철판을 몇 갑절 깔았대도 할 수 없었으니까.
뭐, 여기까지는 좋았다. 우리들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매여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사이는 서서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제 자식들은 충분히 귀여워해 주지만... 육아에 있어선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데 요약하자면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가사는? 가사일은 주부의 의무란다.
그래도 가끔 기분이 내키면 설거지나 분리수거 등을 가끔씩 도와주기도 하고, 이 때까진 나도 조금 섭섭해 하면서도 큰 문제 없이 그럭저럭 지내왔지만...
아이가 다섯으로 늘어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가 늘어났어도 가사와 육아는 여전히 내 차지였고, 그는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이 엉겨도 놀아주기는커녕 내게 보내는 일도 잦았고.
그 때문에 우리 둘은 전에 없이 다투기 시작했고, 머잖아 서로 사과하고 풀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기에 얼마 후 다시 같은 주제로 싸움을 반복하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서로 얼굴 붉히며 싸울 때가 나았을지도 몰라.
지금의 우리는 가사와 육아를 돕는 문제에 대해 서로 말을 꺼내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상태다. 말을 꺼냈다간 다시 싸움이 날 것이 너무나도 눈에 선했으므로.
아이들을 돌보면서 식사 준비를 하는 지금도 그래.
밤에 일을 하니까 낮에 쉬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차피 점심 먹으로 곧 일어날 텐데, 10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상 차리는 동안만이라도 애들이 사고치지 않도록 봐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쪽은 상 차리랴, 애들 감시하랴, 어지른 거 치우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죽겠는데!
...관두자 관 둬.
분노의 기운을 담아 몇 분이고 그를 째려보았지만 기척도 없다. 자고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혼자 이러는 것도 바보 같으니 그만두고 할 일이나 하자.

"미나, 리나! 이리 와서 상에 식기 좀 놓아 줄래? 마사오는 아빠랑 료타 깨우고!"

식구 수대로의 그릇을 놓고, 적당히 반찬을 덜어 한 상 가득 차린다.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상황이라면 식사 한 끼 먹는 것조차 작은 전쟁이 되고 만다.
별로 차린 것도 없는데 밥상 위에 빈 공간이 거의 없는 것은 역시 식구가 많기 때문일까.
제발 한 번만이라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기를-
부질없단 걸 알면서도 마음속으로 빌어보지만...

"우아아아앙!"

꿈을 좇아 들어가는 나의 정신을 낚아채 고달픈 현실로 잡아 끌어내는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또 시작이야.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렸다.
매일매일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틀에 박힌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인데, 왜 오늘따라 이다지도 화가 나는 걸까?

"...뭐야, 왜 이리 시끄러워?"

방금 잠에서 깨어난 흐릿한 목소리 속에 짜증의 미립자가 섞여 사정 설명을 요구한다.
이유를 설명하라는 듯한 무서운 눈초리를 향하자, 마사오가 억울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난 잘못 없어. 그냥 깨웠는데 료타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단 말이야!"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꼬마 범인이 당당하게 자기변호를 한다.

순간, 나는 암묵적인 합의를 잊어버리고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고 말았다. 료타의 울음소리 때문인지, 등에 업은 불과 몇 달 전에 세상 빛을 본 막둥이가 잠에서 깨려는 움직임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리 엄마라도 동시에 울기 시작하는 사내아이를 둘이다 돌보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그가 가사나 육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부탁한 것.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애들 돌보는 건 엄마가 할 일이잖아? 넌 애도 안 보고 대체 뭐 했어?"

...예상대로의 답변이 쌩하니 돌아온다.
아니, 말을 꺼낸 직후 남편의 성향을 깨닫고 아차 싶었지만, 기왕 도와달라고 했으니 조금쯤은 도와주지 않을까 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봤던 건데... 역시나였다.
아무래도 나는 생각 이상으로 지쳐 있었나 보다.
평소 같았으면 남편이 아니라 철없는 큰아들이라며 혀를 차고 끝냈을 테지만...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내 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움직여 새로운 말을 자아냈다.

"자식 돌보는데 엄마 아빠가 할 일이 따로 있어? 내가 하루 종일 돌봐달란 것도 아니고, 밥벅기 전까지 잠깐만 봐달라는 건데 그게 거절할 만큼 힘든 일이야?"

"별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징징거리니까 그렇지! 그리고 애 키우는 건 원래 여자가 하는 일 아냐? 왜 자기 일도 스스로 해결 못 해서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온 가장한테 떠넘겨?"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가시가 돋기 시작하는 그의 말을 따라 내 목소리도 차차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곧 주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크게 화를 낼 거라는 징조다.

"내가 지금 놀고 있어? 놀면서 너한테 떠넘기는 걸로 보이니? 내가 혼자 밖에서 낳아 온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애들을 돌봐야 해? 넌 입으로는 애들이 좋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는 건 하나도 없잖아! 일 벌리는 사람은 둘인데, 왜 나만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느냐고!"

스위치가 켜지고 말았다.
화를 내는데 집중하기 시작한 내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싸움의 기폭제가 된 료타의 울음소리가 어느 새 뚝 그쳐 있었다는 것도, 아이들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한쪽 구석으로 몰려들었다는 것도, 남편의 얼굴이 내가 5학년 때 갓 전학 왔을 때 느꼈던 첫인상 그대로 단단히 굳어졌다는 것도.

"...좋은 말로 할 때 여기서 관둬. 난 너랑 싸울 기분이 아니라고. 애들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허어... 그러셔? 그렇게 애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왜 정작 애들을 돌봐줄 생각은 안 하는 건데? 귀여워는 하지만 뒤치다꺼리는 하기 싫다는 거잖아!"

콰앙!
남편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내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것도 아니고, 여지껏 각자 할 일 알아서 잘 하다가 이제 와서 내팽개치는 이유가 뭐냐고!"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내가 지금 처음 이러는 줄 알아? 똑같은 부탁을 수십 번을 했는데 당신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이 없었던 거잖아!!"

"내가 원래 이렇다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그리고, 애초에 집에서 애나 보면서 노는 사람이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온 사람한테 자기 일을 미룬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지금 내가 집에서 논다는 거야?! 날 집에 들어앉혀 놓은 게 대체 누군데!!! 대학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졸업하면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그걸 다 포기하고 집에 머무는 걸 가지고... 논다고 말하는 거야?!"

"누가 자퇴하랬어? 네 스스로 그만둬 놓고서 왜 이제 와서 남 탓이야?!"

"애는 계속 들어서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지울 수 없다면 낳아서 돌봐줘야만 하잖아! 넌 애들한테 치이면서 경제난에 허덕이더라도 가업을 잇는 일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다름 사람에게 전혀 신경 안 쓸지 몰라도, 난 너랑 달리 그렇게 낯짝이 두껍지 못하다고!"

"자꾸 짜증나게 할래? 네가 무슨 고귀한 희생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데, 아무도 너한테 그렇게 살라고 말 안 했거든!!! 넌 네 이기심 때문에 겉으로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양 행동한 것뿐이잖아! 이런 식으로 남한테 보답을 바랄 거면, 처음부터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지 말든가!!!"

서로의 입장을 배려할 생각도, 자신의 의견을 한 발자욱 굽힐 생각도 없었다. 나와 히토시는 누가 더 큰 고함을 지를 수 있는지 대결이라도 하듯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다.
으아아아아앙.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고함지르기 대결에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은 것은 내 등에 업혀 있던 막내아들의 울음소리였다.
우리들의 고함 소리에 잠이 깼는지 자지러지는 울음을 토해내는 아기 덕분이랄지, 주변은 안중에도 없이 서로 바락바락 악쓰며 싸우던 나는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만하자. 부모가 돼가지고 애들 다 보는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추태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남편이 아까보다는 좀 가라앉은 듯 한 목소리로 휴전을 제시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까지 크게 싸우진 않았을 거고, 둘 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휴전을 제시하면 다른 한 쪽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겠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가사와 육아 문제로 항상 이렇게 부딪히는 일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반세기 이상을 이런 문제로 싸워가며 살고 싶지가 않았다.
때문에... 화가 나면 주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식대로 행동해 버리는 나는 결국 '그 말'을 입에 올려버리고 말았다.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던 아까와는 정반대의 차분한 목소리로.

"...이혼하자. 나... 더이상 당신과 이렇게는 못 살겠어..."

 


그 뒤의 이야기는 그다지 할 것이 없다.
나는 그에게 먼저 이혼 얘기를 꺼냈고, 그 역시 별 거부감 없이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서로의 머리가 좀 더 냉정한 상태였다면 백년해로를 기약한 관계를 깨는데 좀 더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이혼 의사는 확인했지만 재산 분할, 아이의 양육과 그 비용 문제 등으로 나와 그는 다시 대립해야만 했고, 결국 서로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조정위원회를 거쳐 법원의 중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지, 나나 그나 각자의 이기심으로 자식들을 팽개칠 만큼 맛이 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이의 양육 문제는 그다지 큰 트러블 없이 협의를 마칠 수 있었다. 오히려 재산 분할과 양육비 등 돈 문제에서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지.
학교에 들어간 마사오와 유치원에 다니는 쌍둥이 딸을 그가 돌보고, 아직 어린 료타와 미노루를 내가 맡으며 매달 양육비를 서로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어, 아가씨. 언제 오셨습니까?"

큐브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선잠에서 깨어났다.

"큐브? 언제 온 거야?"

"방금요. 아가씨께서 주무시고 계시길래..."

"응... 좀 전에 왔는데 나도 모르게 잠깐 잠이 들었나 봐."

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팔을 뻗어 다시 기지개를 켰다.

"아, 그래. 큐브. 혹시 간식거리 없어? 쇼콜라라든가 젤라토라든가. 웨하스나 와플이나 하다못해 핫케이크라도 좀 구워 줘! 우유 넣은 홍차랑 같이!"

"...아가씨, 왠지 결혼하기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으신 것 같아 보이는 건 제 기분탓인가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큐브를 향해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나라고. 결혼을 했었다고 내가 변하진 않아. 그건 그렇고 법원에 들락거렸더니 피곤한 걸. 나 잠깐 위층에서 애들이랑 쉬고 있을 테니까 준비 다 되면 불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