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입니다, 선생님.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했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긴자 제일 최고급 클럽 도화원에 들어선 모리 산쥬로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스폰서에게 말했다.

"마담, 여기 핑크 돈 페리뇽 두 병과, 예약할 때 말했듯 제일 잘 나가는 아가씨들을 부탁해요."

손님들을 위해 정성껏 세팅된 테이블에 고객들이 자리 잡는 것을 기다려, 모리 산쥬로가 마담에게 주문을 넣었다.
술은 예쁜 여자가 따라줘야 제 맛이 난다며 저속한 만담을 지껄이는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길 수 분, 이윽고 문이 열리고 술이며 갖가지 안주들과 함께 고객 수에 맞춘 호스티스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쥬로 역시 남자인지라, 눈에 띄는 아이들은 고개그이 차지가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차례차례 들어오는 호스티스들을 마치 품평하듯 훑어내리던 중-
한 호스티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사랑스러움을 자아내는 불그스름한 금발. 대리석을 닮은 흰 피부, 신비한 비밀을 감춘 듯, 미스터리어스한 루비색 눈동자.
19세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이성으로써 호감을 쌓던 그의 전 여자친구.
고등학교 졸업 후 별안간 훌쩍 모습을 감췄던 그녀가 어깨를 훤히 드러내 보이는 자색 드레스를 걸친 채 다른 호스티스들과 함께 모리 산쥬로가 모셔온 고객들 사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검과 마법, 신과 마, 인간과 요물, 다섯 개의 세계 등 지구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신기한 요소들이 가득한 세계였다.
지구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판타지 소설의 배경과 가장 근접하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위태위태했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인간계를 대표하는 프린세스 후보라는 거창한 직책을 짊어지고, 외딴 성에 유배되다시피 격리되어 한 나라의 왕자비에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쓸쓸히 지내던 어느 날, 비극이 벌어졌다.
천계의 야심가 알포트를 선두로 마계, 인간계, 성령계, 요정계에서는 각 세계를 대표하는 지휘자를 내세워 조화와 안녕을 갈구하는 5계에 반기를 들어 혁명이라는 미명 하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5계가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인 프린세스를 제거하는 것.
아직 프린세스로 결정된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두고 수련하는 후보들에게로 돌아갔다.
차례차례 살해당하는 프린세스 후보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나는 혁명 세려그이 손아귀를 피해 운 좋게도 마족 집사의 도움을 받아 차원이동을 통해 이(異)세계 -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계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프린세스 후보로서의 기억을 전부 봉인하고, 나는 그대로 지구의 일원으로서, 평범한 학생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굴레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혁명 세력이 보낸 자객은 끈질긴 추적 끝에 기어이 나를 찾아냈고, 내 부모님을 앗아간 방울 소리를 통해 나는 봉인되었던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나를 죽이면 혁명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루게 된다면서 문답무용으로 달겨드는 자객을,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아빠가 물리침으로써 얘기는 일단락되었다고 여겼다.
적어도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의도치 않게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고, 때마침 찾아온 사춘기와 맞물려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있을 곳은 아빠와 큐브가 있는 히메미야 마을이라고 결정했었다.
불과 2~3년이라곤 하지만 현재진행형으로 나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는 내게 있어 프린세스라는 지위가 현실감 없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던 왕자님에 대한 동경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데다, 괜히 귀환해서 자칭 혁명세력이라는 녀석들에게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당하는 것도 지긋지긋했고, 다시는 자객들이 이 마을로 찾아오지 못하도록 주문을 걸었으니, 여기서 목숨을 위협당할 일은 더 이상 없을 테고.
이제 나는 나나 초이스라 불리던 프린세스 후보가 아니라 아야키 후타바라는 평범한 학생으로 살면서 친구를 사귀고 진로를 고민하면 되는 줄 알았다.
SNAP의 최고 인기 가수 아키즈키 신야의 사인이 들어간 CD를 얻기 위해 아침 댓바람부터 추위와 싸워가며 CD숍 앞에 줄을 서 보기도 하고, 사이가 나빠진 친구와 절교를 하기도 하고, 취미를 위해 등록했던 학교 합창부의 대표로 현 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하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들렀던 패션 빌딩에서 예능 프로덕션 매니저의 눈에 띄어 극단에 교육생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개인에 따라선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평범한 생활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
눈에 띄는 짓 따윈 거의 하지도 않았고, 한다 했더라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는데... 대체 어디서 비밀이 새어나갔던 것일까?
나의 평범했던 고등학교 생활도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 사람은 금발의 푸른 눈에 흰 피부라는, 전형적인 동화 속 왕자님의 모습을 한 채로 내게 말했다.
프린세스에 걸맞게 성장한 후보를 데리러 왔다고.
예의나 배려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적어도 얘기는 빨랐다.
이미 프린세스는 되지 않겠다고 예전에 아빠와 이야기해 두었기 때문에 나는 단칼에 그 제의(를 빙자한 명령)을 거절했다.
그랬지만... 그렇다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물러갈 만큼 왕자는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궤변으로 내가 보여주는 모든 언행을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며 근 1년을 쫓아다닌 것이다.
쫓아다녔다고 해 봤자 내 뒤를 졸졸 따르는 스토킹이 아니라 내가 자주 들르는 공원이나 번화가에 불쑥 나타나는 정도였지만... 음, 이렇게 쓰고 보니 역시 스토킹이 맞는 것 같기도 해.
처음에는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왕자의 집념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서서히 손을 뻗었고, 사람들을 천천히 함락시켰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밖에서 만난 사람들, 예능 프로덕션의 동료들, 그리고... 패션 빌딩에서 '나'라는 원석을 발견하여 보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사장님 몰래 서로를 알아가자는 약속을 하기에 이른 남자에게까지.
그 사람에게서 혹시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때까지 나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을 손톱만큼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에 대한 일을 그리도 모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내 주변을 얼쩡이며 물 밑 작업을 마쳐놓은 왕자는 센터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던 어느 겨울날, 하마사키 해변으로 반강제로 끌고 가 프린세스가 되어 달라는 이기적인 프러포즈를 던져 놓았다.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그는 나와 커뮤를 맺은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입에 올리며, 나를 옭아매겠다는 협박을 해 왔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런 판타지 같은 얘기를 덥석 믿을 멍청이가 세상이 어디 있겠냐며, 마음대로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 왕자가 맘대로 행동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른다. 마법을 썼는지, 신기에 가까운 화술을 썼는지, 아예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조종을 했는지...
겨울 방학을 마치고 평상시의 생활로 돌아온 내가 처음 마주한 것은 나를 슬슬 피하는 동급생들의 눈초리였다.
내 정체를 상대가 납득할 때까지 붙들고 '설득'시킨 건지, 고전적인 방법(힘으로 밀어붙이기 같은)으로 '설득'시킨 건지, 그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에는 공포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예능 사무소에서도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실장님께 불려가 필요 없으니 당장 프로덕션에서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야 나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왕자가 나를 잡기 위해 쳐놓은 덫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는 것을 개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미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자신의 손을 잡는 선택지만을 남겨둔 채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유혹의 소나타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마치 줄을 치고 먹이를 유인하는 거미처럼.
여기서 문제 하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길을 앞에 두고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정석대로 발을 밟아 그의 손아귀 속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우격다짐으로라도 다른 길을 찾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을까? 아니면... 구멍 속에 들어가지 않고 나름대로의 빛을 찾아 발버둥쳤을끼?

 

"어머나, 사장님. 왜 이렇게 발길이 뜸하셨어요? 이러다 얼굴마저 잊어버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고요."

오랜만에 찾아온 단골손님의 지명 테이블로 다가온 나는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와 우연히 재회한 사람처럼 유난을 떨며 상석을 차지한 남자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아 아양을 떨었다.

"아, 회사의 사활을 걸었던 이전의 상담이 잘 결정되었다고요? 그거 정말 잘 됐네요. 그럼 이렇게 좋은 날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죠? 모처럼 오셨으니 오늘은 축하주 한 잔 하도록 해요. 사장님께 한 잔 따라 올릴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신다면 기쁘겠어요..."

"어허, 마도카. 장사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구만. 뭔가를 팔려면 먼저 손님의 비위를 맞출 줄 알아야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긴다. 나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남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가, 그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어 가슴에 갖다 대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장님도 참... 밤은 아직 깊어요. 안달하지 않으셔도 꿈을 즐길 시간은 충분하답니다... 여기,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시죠? 제 심장이 뛰는 동안에는 걸어둔 마법이 깨지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부디 천천히 밤을 즐기시길..."

나는 더욱 고개를 숙여 그의 귀에 대고 마법의 말을 속삭였다.

"서비스는 둘만 있을 때 팍팍 넣어드릴 테니까요. 부디 잠시만 참아 주셔요, 네?"

"하하, 우리 마도카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밤이 될 때까지 기분 좋게 한 번 달려볼까? 그 뭐냐, 핑크 돈 페리뇽 하나 부탁해."

"아하하, 역시 사장님 최고~!"

생각보다 입질이 빨리 오는 것이 오늘은 왠지 운수가 좋은 것 같다. 나는 바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주문받은 내용을 알렸다.

"마담 언니~ 여기 핑크 돈 페리뇽 하나 부탁드려요~"

확실히 접수했다는 사인을 캐치하면서 아이 사인을 보낸다는 뜻으로 윙크 한 번. 비밀이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마담 언니와 주고받는 일종의 암호이다.

"사장님, 요새 통 찾아주지 않으셔서 마도카가 얼마나 섭섭해 했는지 몰라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얼마나 걱정했었다구요."

주문받은 술과 서비스 권을 직접 가져온 마담이 한 수 거든다.

"마도카, 조금 있다 안쪽에 예약한 손님들이 오실 테니까 가서 준비하도록 해."

"지금요?"

"어이어이, 그건 안 되지. 마도카는 오늘 내가 독점할 예정이었다고. 이렇게 맘대로 빼내가는 게 어딨나?"

마담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뭇 남성의 애간장을 태우는 가느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오해 마세요. 이래봬도 저 아이는 꽤 많이 기다려준 거랍니다? 사장님께서 통 들러주질 않으셔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손님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금방 끝날 테니까 부디 오늘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셔요. 그 때까지 대신 제가 시중을 들어드리죠... 괜찮으시죠?"

우와아.
나는 내심 감탄했다.
언령과 연기 스킬은 나도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마담 언니의 스킬은 뭐랄지... 나 같은 레벨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아득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다.
같은 밥을 먹고 사는 존재인데도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할까, 범접할 수 없는 포스가 있다고 할까... 평생을 노력해도 저 사람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곧 도착할 거라는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드레스를 갈아입고 화장을 손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술 연지의 색이 바랜 것 같아 개인에게 할당된 비좁은 룸으로 막 들어갔을 때, 바깥 문이 열리면서 다른 호스티스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처럼 잠시 준비하러 들어온 것이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연지를 찾아 입술에 댔을 무렵 그들이 소곤소곤 뒷담을 까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 약 올라. 이번 달도 저런 꼬맹이에게 넘버원 자리를 뺏길 줄이야... 마도카 녀석,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하나에 백만이나 하는 병을 낼름낼름 먹는 거지?"

"마도카의 테이블 손님, 아까 보니까 모두 편안하면서도 즐거워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 있던데... 치유계 컨셉으로 나가는 건가?"

...누군가 했더니 나였잖아.
본인 험담을 듣는 건 기분 나쁘지만, 지금 나가서 놀래켜 주기는 좀 뭐하고... 조금 시간이 있으니 들으면서 타이밍을 재는 게 나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째서 네가 마도카를 이길 수 없는지 알고 있니?"

대체 언제 자리에서 나온 걸까. 내 손님을 대신 상대하던 마담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담?! 언제 여기... 아니,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상대의 당황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톤으로 봐선... 나 때문에 넘버 투로 밀려난 이즈미인가.

"후훗, 이 가게에선 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문 따윈 없단다."

마담 언니가 웃었다.

"이즈미, 로져. 넘버원 자리를 되찾고 싶다면 잘 들어. 손님은 말이지, 낮 시간 동안의 일이나 책임으로부터 해방돼서 휴식을 취하려고 이 가게에 오는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게 해 주는가, 기분 좋게 마실 수 있게 해 주는가, 그것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게 우리들의 일이야."

"......"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마담 언니는 여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마도카의 미소를 잘 보아두렴. 그 아이는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것 같거든. 본능이 이 세계를 향하고 있는 거겠지. 앞으로가 볼만할 거야. 어쩌면 머잖아 날 능가할지도 모르니까."

이제 그만 떠들고 손님을 받으라며, 마담 언니의 재촉으로 안으로 들어왔던 호스티스들이 쫓겨나갔다.
나가면서 마담 언니는 내게 할당된 룸의 도어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들겼는데... 아무래도 내가 본의 아니게 숨어 지금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는 걸 아는 거겠지...?

"푸하."

모두가 나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문을 열고 바깥 공간으로 뛰쳐나왔다.
문득 거울을 보자, 항상 익숙한 여자의 얼굴이 어른의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 곳에 뛰어든 지 몇 년이나 지난 걸까.
말도 없이 뛰쳐나왔으니, 아빠도 큐브도 무진장 걱정하고 계시겠지.
이따금 걱정하는 가족들 생각이 떠오를 때면 회한과도 같은 새로운 감정이 솟구친다.
난... 언제까지 술집 일을 계속할 것인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왕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졸업하자마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업계에 뛰어들긴 했지만... 이 일은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당분간은 그만두고 싶지 않다. 어쩌면 성격에 맞아서일지도 모르지.
마담 언니가 지어준 마도카라는 업계용 예명도 꽤나 마음에 든다. 그 이름으로 불릴 땐 마치 또 다른 자신이 되는 것 같으니까.
이 곳, 도화원은 그 누구도 나의 신분에 대해 캐묻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노력을 쌓아올리고, 모든 것을 당연하게 누려왔던 세계는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도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기 때 나는 별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천천히 위를 향헤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여기 마담의 눈에 띄었고, 어렸을 때 그가 나를 발견하여 예능 사무소로 데려갔던 것처럼, 마담은 나를 도화원으로 데려와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나는 그것을 발판 삼아 아까 마담이 말했던 것처럼 노력하여 이즈미를 제치고 넘버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거울을 향해 중얼거려 마음을 다잡는다.
도화원은 긴자 제일의 고급 클럽인 만큼, 이 곳을 방문하는 손님은 대기업의 사장이나 내노라하는 연예인, 아니면 그들을 관리/배출하는 관리자들이 많다. 이따금 정치가가 들르기도 하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난 멋대로 '밤의 얼굴'이라 부르고 있지만.
자신의 본능을 몇 갑절 꽁꽁 싸매어 내놓는 낮의 얼굴과는 달리, 밤에는 모두가 본심을 꺼내든다.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그들의 본심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다.
이쪽 세계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고 표현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이 나라 정치와 재계의 연결이라든지, 지위는 다르지만 결국 남들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남녀의 사랑 놀음이라든지, 그 이면의 전부를 말이다.
이 곳은 주간지나 와이드쇼 기자들이 냄새를 맡는다면 얼마가 들더라도 기꺼이 다룰 것 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온다. 물론, 신용과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절대로 정보를 팔거나 하지는 않지만.

"...읏차, 그럼 또 힘내서 꿈을 만들어 줄까?"

나는 양쪽 뺨을 가볍게 두들기는 것으로 각오를 다지고,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던 호스티스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제일 먼저 대기하고 있던 호스티스가 방금 우리들을 지명한 예약 손님들이 방금 도착했다고 일러 주었다.
지명된 아가씨들을 들이기도 전에 먼저 주문을 넣었는지, 아까 손님에게 주문시켰던 핑크 돈 페리뇽 2병과 갖가지 안주들이 운반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흐음, 아무래도 이번에 상대할 손님들 역시 주머니 사정은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아, 이번 손님은 과연 어떤 욕망을 숨기고 있을까나?
수로가 안주가 세팅되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가 우리들은 먼저 기다리고 있던 순서대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

찰나의 꿈을 심어줄 손님들의 캐릭터를 분석/파악하기 위해 자리를 훑던 중, 이질감을 뿜는 존재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탁해질 대로 탁해진 나의 눈동자 속에 비친 그 사람은... 내가 지금보다 철이 없었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누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 한 때나마 장래를 꿈꿀 수 있게 도와주었던 선배이자 조언자이자 연인이었던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싿.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은 차마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조용히 망그러진다.
나의 시선을 깨달은 건지, 그 역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완벽히 굳어버렸다.
동료로부터 멍하니 서서 뭐하냐는 사인이 담긴 팔꿈치의 가격을 받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심하게 동요하는 심장을 움켜쥐고 고객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공교롭게도 그와 가까운 자리잖아...
분위기가 무르익고 서로의 태도가 좀 더 누그러졌을 무렵, 나는 어느 새 그가 내 옆자리로 다가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이쪽을 주목하는 이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가 입을 열어 잊어 버렸던 내 진짜 이름을 불러 주었다. 몇 년 만에 듣는, 한결같은 목소리로.

"후타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