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랫동안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오늘로 이만 곁을 떠나야만 합니다. 제 고향인 천계로 돌아가게 되었거든요.
천계는 싸움도 악인도 없는 조용한 곳입니다.
자신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남을 상처 입히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인간계만큼의 떠들썩함은 없는, 살풍경한 곳이죠.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니, 제가 스스로 선택하고서도 섭섭한 마음이 드네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지상에서 지친 마음을 여기서 치유하는 것 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요.
큰 은혜를 베푼 아빠, 8년 동안 같이 지냈던 다른 후보들, 우리들을 응원해 주었던 마을 사람들, 평민 정혼자 간택이라는 무리수를 둔 왕궁...
그리고... 저와 함께 많은 추억을 공유해 온 큐브...
그들과 쌓았던 추억은 기억 속에 새겨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이제 저에게 남은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요.
그럼 아빠, 인간들을 위하여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열심히 신을 섬기어 주세요.
저는 아빠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답니다...

 

 


끝없는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는 공포와 홀로 싸우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존재는 나를 한 줄기 빛으로 이끈다.

"당신은 어둠 속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한다.

"그럼... 난 어디에 있어야 하죠?"

내가 물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빛을 가리켰다.

"만물을 비추는 빛... 당신이 계셔야 할 곳은 저 곳입니다. 어둠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이죠."

"...또 만날 수 있는 거죠? 빛과 어둠은 항상 공존하고 있으니까..."

희망을 담아 내가 물었고, 나를 빛으로 이끌어 준 그는 초연한 미소를 뿌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그 손을 잡으려 힘껏 팔을 뻗어보지만 어째서인지 손은 잡히지 않고 주춤했던 어둠은 슬금슬금 날개를 펴 나와 그의 사이를 가른다.

"가지 말아요!"

어둠에 먹혀 말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을 따라잡으려 애달픈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를 찾기 위해 끝없는 어둠 속을 달리고 한참 어둠 속을 헤매다 결국 내가 서 있는 세계 속에서 눈을 뜨고 만다.
항상 반복되는, 언제나와 같은 꿈.
목에 걸려 넘어가지 못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그것은 슬픔일까, 동요일까, 아니면 공포일까.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축축이 젖어 있는 뺨을 타고 한 줄기 물안개가 하롱하롱 방울져 내린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과,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 자국.

"...꿈이었구나..."

창을 덮은 엉성한 판자와 주변을 빽빽이 둘러싼 대리석을 향해 어슴푸레한 빛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천계로 귀환한 뒤에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간의 개념도, 날씨나 날짜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천계는 항상 평화롭고... 지루하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내가 매일 꾸는 그 꿈은 천계에서 흐르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시간을 가늠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지상에 내려놓은 그립고도 소중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보물 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항상 같은 장면에서 끝나버리는 아련한 꿈 내용을 기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드려야만 하겠지.
수호신님의 권유를 받아 천계로 돌아오겠다고 결정 내렸을 때부터, 두 번 다시 쓸데없는 미련은 갖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맹세하지 않았는가.
어디에 있든 그가 살아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는가.
스스로를 옭아맨 사슬을 상기시키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고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오늘도 무료한 시간(개념은 없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이 무사히 지날 수 있도록 신께 기도를 올리고, 나는 무의식중에 지난 삶을 추억할 수 있는 마지막 보물을 꺼내 들었다.
마계에서만 채굴되는 마법석의 오묘한 빛에 갇혀 박제된 네잎 클로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설령 그것이 내 목숨일지라도- 소중한 나의 보물.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가져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지니고 계시면 언젠가 반드시 행운이 찾아올 거예요-

18세가 되던 날, 인간계에서 맞았던 나의 마지막 생일에 선물로 건네 준, 그가 속삭였던 달콤한 비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일만큼은 방금 겪었던 것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받았던 그 날, 나는 천계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까...
나의 생일은 몰리뉴 왕국의 신년 축제날과 항상 겹쳤기 때문에, 다른 프린세스 후보들에 비해 항상 풍족한 생일을 맞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단순히 선물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나이를 먹으며 눈을 뜨게 된 뒤로부터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을 차지한 그의 존재감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는 것, 별로 관심 두지 않았던 프린세스의 자리가 서서히 내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는 것, 세상 일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는 것, 친구처럼 지냈던 프린세스 후보 중 하나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이 또한 초석에 불과했을 뿐이다. 내가 인간으로서의 삶에 본격적으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7세 수확제에 참석하여 당당히 우승컵을 거머쥐었을 때였다.
수확제를 관람하러 왔던 왕자는 축하의 선물을 건네겠다는 구실로 은밀한 정원으로 나를 불러냈고, 나는 문답무용으로 왕자의 진솔하면서도 이기적인 사랑의 고백을 들어 줘야만 했다.
말하고 싶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고백은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미 권력의 횡포와 국법의 무자비함을 알게 된 나로서는 감히 솔직한 대답을 들려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와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화가 미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나는 겨우 머리를 굴려 내가 프린세스 후보라는 사실을 상기했고(프린세스 후보로서 프린세스가 간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은 일단 무시하도록 하자), 이를 핑계로 내세워 겨우 왕자의 고백을 보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때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일단 왕자의 고백을 뒤로 미루고 프린세스 후보로서 분발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무진장 노력하는 다른 후보가 프린세스가 될 것이고, 왕자의 관심도 더 이상 나를 쫓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때의 나는... 너무나도 순진했다.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영악한 요물인지 몰랐다.
내가 18세 생일을 맞았던 그 날, 그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신년 축제에 참석했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은밀한 정원에서 밀담을 나누는 왕자와 크루거 장군의 모습을.
교양 있는 숙녀라면 알게 된 즉시 자리를 빠져나왔을 것이고, 나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의 밀담에 오른 주제가 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의 말이지만.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 화살은 명백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된 밀담 속에서 거론된 하나의 이름.
큐브.
왕자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나는 몸을 떨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확신을 안은 채,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더욱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접근했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내 뒷조사라도 명령했던 것인지, 그들은 나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이름과 출신지, 퀘스트 성적밖에 알지 못하던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나의 취향, 마법의 상성, 가치관, 우리 집의 재정 상태, 마을의 평판 등을 줄줄이 꿰고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해야 할 지, 큐브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모은 것 같았다. 뭐,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아니, 당사자는 기분 나쁘겠지만 어쨌든 괜찮다고 치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라'는 암살 의뢰를 거리낌 없이 지시하는 걸 들어버린 날에는 대체 어떡해야만 할까.
큐브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큐브를 걱정을 하는 건 맞는데 그 대상이 그의 안전이 아닐 뿐.
큐브는 상당히 강하다. 나도 순조로운 퀘스트 여행을 위해 마도를 배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과 다른 전사의 레벨을 측정하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나름대로 경험을 쌓은 내 눈으로 봤을 때 큐브는 상당한 실력자임이 틀림없었다.
엘프가 귀띔한 대로 큐브가 정녕 '고귀한 배신자'라면, 인간 암살자 따위는 웃으면서 상대할 수 있을 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왕자가, 암살자만으로 큐브를 처치할 수 없단 걸 깨달으면 다음에는 어떤 방도를 취할까?
그에게 손댈 수 없단 걸 깨닫고 강제로 나를 취할 수도 있다.
나를 이단자 취급하며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지시할 수도 있다.
정녕 나를 취하려 든다면, 아예 마왕과 약속했던 100년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마족 자체에 싸움을 걸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마족과는 달리 인간은 얼마든지 자신들이 한 약속을 깰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이라 할 수는 없다. 특히나, 일을 벌이려는 자가 날 때부터 권력을 쥐고 살아온 자들이라면 더더욱.
그 대가는 누가 치르게 될까?
통치자가 벌인 짓의 뒷수습은 온전히 백성들의 몫이다. 왕자가 무슨 일을 벌이건 간에, 그 책임은 아랫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듯이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 쉽사리 포기할 생각이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피를 흘리든 눈물을 흘리든 나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인해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아파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 잘못도 아닌데,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기력을 쏟을 만큼 위선자가 아니거든.
하지만 내가 아는, 그것도 나와 상당히 가까운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잘못을 했건 안 했건, 내가 원인이 되어 내 사람들이 피 쏟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오랜 결정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 내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같은 문제가 터지고 말 테지.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태어나 자랐던 천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설마 여자 하나 때문에 신에게 반기를 들 만큼 왕자가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을 테니.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측근이 간간이 알아보는 바에 따르면, 내가 천계로 귀환한 후 인간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의 스케줄이..."

나는 마법석을 다시 봉인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획표를 찾아 책상 위를 뒤적였다.
아무리 뒤적여도 보이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누군가를 붙들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정중한 노크와 함께 누군가가 불쑥 내 방에 들어섰다.

"...안젤리카? 무슨 일이죠?"

나는 생각의 늪에서 서둘러 빠져나와 나에게 주어진 현실의 종소리를 붙잡았다.

"저어... 클로버 님을 만나고 싶다며 찾아온 길손들이 있습니다. 안 된다고 말씀드려도 원체 막무가내라 어떻게 해야만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실력 행사를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평소의 당당함을 내려놓고 당혹의 빛으로 얼굴을 물들인 천사를 주시하며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내가 천계에 자리를 잡자마자 천사들에게 제일 먼저 내린 명령이 그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간에 무조건 천계에서 쫓아내라고.
방법도 그들에게 일임했고, 생사 여부도 고려하지 않는다. 죽이든 살리든, 장난감 취급하다 갖다 버리든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이다.
...냉혹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이쪽에서 강경 대응을 하지 않으면 무서운 얼굴로 나를 몰아붙인 왕자는 그 성격과 행동력으로 보아 이 곳까지 따라와서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불행의 싹은 애당초 잘라내는 게 옳겠지.
나와 친분이 있던 친구들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럴 일은 없었다.
다른 후보들에게는 내 정체와 함께 천계로 돌아갈 거라고 알리긴 했지만, 그녀들은 프린세스가 해야 할 일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인생을 헤쳐 나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터. 나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큐브는... 천계로 돌아가겠다는 내 의사를 존중하고 깨끗이 물러났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는 거하고 본인이 납득하는 거하고는 얘기가 다르니 아마 본인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붙잡아 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본인의 슬픔을 감추고 내 생각을 받아들인 그에게 더 이상 이기적인 어리광을 부릴 순 없었다.
즉, 나에게 집착했던 왕자 외에는 이 곳에서 나를 찾을 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게... 길손들은 남녀 페어였는데 둘 다 실력이 출중합니다. 견습 천사들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쪽의 여자 1명이 무조건 클로버 님을 뵈어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안젤리카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지팡이를 흔들며 난처한 어조로 대답했다.
-흐음...
나는 견습 천사들을 요리하고 안젤리카를 절절 매게 만든 불청객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내가 갓 천계에 귀환했을 무렵 이따금 이 곳을 찾은 인간 무리들은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내 휘하의 천사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쫓겨났었는데... 그 천사들을 밟아버릴 정도의 실력을 갖춘 길손이라... 어찌 궁금하지 않을쏘냐.

"안젤리카, 혹시 그들이 이름을 밝혔나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물었다.

"아뇨... 클로버 님께서 얼굴을 보면 아실 거라며, 밝히지 않았습니다."

"금발의 남자가 있던가요?"

두 번째로 던진 질문에도 안젤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왕자가 직접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 빈틈없고 손해 안 보려는 성격 상 뒷감당이 두려운 문제에 당당히 앞장설 만큼 그 남자는 머저리가 아니니까 그럴 리는 없지.
나는 치유의 지팡이를 들어 전투 복장을 소환하였고, 그것들이 제 자리에 위치하였는지를 가늠하며 안젤리카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그들을 만나보겠다고 전해줘요. 장소는 박애의... 아니, 유혹의 시련장으로."

"직접 상대하시려고요?"

"그래요. 견습 천사들이 경험으로 삼기에는 벅찬 것 같으니까요. 애초에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고."

나는 다른 지팡이를 집어 들며 단호히 말했다.
안젤리카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한 발 앞서 내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나는 천사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소 중 하나인 유혹의 시련장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겁을 단단히 상실한 그 정신머리를 직접 고쳐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 한가운데 서 있는 검은 인영이 제이 ㄹ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둠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이죠.

꿈속에서 들었던 초연한 목소리가 다시 들린 것만 같았다.
만남의 장소로 이 곳을 지정한 것이 애당초 잘못이었던 걸까?
나의 눈에 들어온 암흑의 실루엣은 내가 꿈속에서 그토록 잡으려 애썼던 그와 잔혹할 만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고 보니 나, 시련장에 걸린 일루젼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제마 베일을 챙기지 않았던가...?
나의 기척을 느꼈는지, 먼저 도착해 있던 방문자가 내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무심코 뒷걸음질 치는 나.
그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밀려드는 호기심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이 곳까지 올 리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는 혹시나 하며 고개를 들려는 덧없는 희망을 제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 자신을 다잡았다.

"...클로버?"

나의 전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잔혹한 그림자가 꿈속에서밖에 들을 수 없었던 달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담는다.
나는 무너지려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어 벽에 기댔다.
-이건... 정말로 환상인 걸까? 현실일 가능성은...
혼란에 빠진 머리가 멋대로 회전한다.

"괜찮아요?"

'그'는 무정하게도 내게 똑바로 다가와,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살며시 얹는다.
내 전신에 퍼지는 그립고도 익숙한 느낌.
내가 항상 바라마지않았던, 친숙한 기운.
꿈에서만이라도 담아 보고자 달리고 또 달렸지만, 끝내 잡을 수 없었던 덧없는 그 바람.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서서 나를 속박하고 있었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아, 맞다. 여기 말이죠. 이상한 주문이 걸려 있기에 강제로 멈춰버렸는데... 괜찮겠죠?"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서 손을 떼며 '그'가 중얼거렸다.
잠깐... 그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지?
강제로 멈추었다고 말했다. 이 공간에 걸려 있는 이상한 주문을. 대상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일루젼 마법을.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믿을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이룰 수 없었던 일이... 지금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는 거야?
그 순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내 등을 떠밀기라도 하듯 밖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린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저 여자 잡아!
-누군 놀고 있는 줄 알아?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잡으라고!
-제길, 무슨 인간이 저렇게 빨라? 거기 서지 못해!
-죽이진 마! 클로버 님이 만나보겠다고 하신 인간이라고!

...아무래도 천계에 들어온 인간 하나를 잡겠다고 천사들이 쫓아다니는 모양... 아.
그제야 나는 안젤리카의 전언을 기억해 냈다. 나를 만나러 온 '남녀 페어'의 길손들이 있었다고.
밖에서 피우는 소란으로 유추하자면, 천사들을 애먹이고 있는 여자는 아마 신기에 가까운 체술을 익힌... 내 오랜 친구 엘리너일 터.
의중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녀가 천계를 방문했다는 거고, 덜렁거리는 주제에 은근슬쩍 나서서 주변 사람들을 챙겨주는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나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차올랐고, 놀라움으로 벌어진 동공은 닫힐 줄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서서히 손을 뻗어, 언제나 다시 만나기를 고대했던 그리운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아, 손끝을 타고 전해오는 따뜻한 체온.
꿈이 아니었다. 조잡한 마법이 시험하는 환상도 아니었다. 눈앞에 선 '그'는 현실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얼굴에 기댄 나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들어, 수백 수천 번을 되뇌었던 그리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큐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