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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지 말라.
가장 깊은 사랑은 가장 무서운 부메랑이 되어 그대에게 돌아올 것이다.
우당탕탕!!
얼마나 날아다닌 것일까.
거리도 방향도 가늠하지 못하고 마법석에 끌려가다시피 하여 마족들에게서 겨우 도망친 에이미는 별안간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야야야..."
지끈지끈 열이 오르는 이마를 감싸 쥐며 에이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딪힌 충격으로 집중이 풀린 탓인지, 마법석은 빛을 잃고 제 기능을 멈춘 것 같았다.
겨우 일어난 에이미는 머리를 식힐 겸, 가죽 투구를 벗으며 눈에 힘을 주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혹여라도 적이 쫓아오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후우..."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어쩐지 에이미의 마음속에서 자신과 박치기를 한 괘씸한 유기물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오호라, 네가 나한테 박치기를 시도한 녀석이구나..."
에이미는 자신의 눈앞에 선 가지가 앙상한 나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나무에게 본인이 날아와 머리를 박은 거지만, 그건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아아압!"
에이미는 묘한 기합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발차기를 먹였다. 그 뒤는 뭐...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아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날카로운 통증 때문에 발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듣고 나서야 겨우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자각한 에이미는 원맨쇼를 벌인 자신을 탓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자기 발을 희생양으로 삼아 냉정해지고 나서야, 에이미는 겨우 자신이 놓인 상황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 일단 날 미끼로 삼아 왕자님을 피신시키고 마족 놈들과 마주했어... 하지만 더 이상 마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주문을 외웠을 때 빛이 나고... 그 덕이랄지, 이 곳까지 날아올 수 있었어. 그래, 뭐 거기까지는 좋은데..."
아무도 듣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는 혼자 중얼거리며 주변을 서성였다.
특별히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니다.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는데 더 편했던 것이다. 물론, 적지에 혼자 남았단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함도 있지만.
"빛 속에 숨은 작은 정령이여, 나의 손에 모여 힘이 되어라!"
에이미는 시험삼아 영창이 짧은 주문을 외워보았으나 그녀의 손에는 작은 불씨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역시... 마력을 다 써버린 거군..."
에이미는 안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 곳은 적지이며 지금은 전쟁 중이다. 유일하게 마법석을 전투에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최전선 병력에 배치되어 연일 소규모 전투를 치러 왔으니, 마력이 제대로 회복될 리가 만무했다.
조금씩 회복되는 마력과 남아 있던 마력을 무기로 싸우던 중,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바닥을 보인 것이리라.
아마 샤를이 무사히 도망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마법을 끝으로 마력은 바닥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곳까지 날아오는 마법을 쓸 수 있었을까?
에이미는 상황 정리 중 떠오른 의문을 머릿속에 담았다.
마력이 바닥났다는 건 방금 시험 삼아 외운 주문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하지만 아까 도망치기 직전에는 주문을 외우자 마법석이 빛나지 않았는가.
소량의 마력이 남아 있던 것인지, 아니면 날아올 때 당시 들었던 마법석이 자신을 이끈다는 느낌이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건지...
"...에라,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생각하지 뭐."
에이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마력량을 착각했든지, 아니면 어쩐지 마도적인 힘이 개입한 거겠지.
에이미에게는 그런 아무래도 좋은 문제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적들에게 들키지 않고 동료들과 무사히 재회할 수 있느냐는 것 말이다.
일단 이 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방향 측정을 위해 에이미는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고-
"...!"
별안간 긴장의 끈이 팽팽히 당겨졌다.
이 곳에, 그녀가 속한 이 공간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특별히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계속되는 전쟁 때문인지 근방에 서식하는 희귀 생물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하지만 누군가의 기척은 분명히 존재한다 - 에이미의 본능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에이미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기척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한 걸음 발을 디뎠다.
잡초조차 자라지 않는 드라이한 흙을 밟으며 에이미는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
오묘한 기운을 내뿜는 수목을 걷어 올리자, 에이미의 눈에 이제껏 본 적 없는 이질적인 존재가 들어왔다.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어깨 부분에서 무릎까지 늘어뜨린 독특한 장식의 칼자루가 돋보이는 대검.
Cloud Blue를 좀 더 희석시킨 듯 한 머리칼. 멀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긴 소매 아래로 슬쩍 보이는 창백한 손, 짙은 남색 망토.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댔다. 멀찌감치 앞에 서 있는 저 녀석이 인간일 리는 없으므로.
칼자루를 잡은 그 순간, 공기가 변했다.
귀에 거슬리는 바람소리가 대지를 때리고, 덮여 있던 흙먼지가 휘날렸다.
1초도 채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에이미는 엉겁결에 손에 쥐고 있던 투구를 던지며 옆으로 뛰었다.
그와 동시에 뒷머리를 긁은 듯한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뒤를 돌아보자, 반으로 갈린 투구와 함께 방금까지 잘 붙어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무래도 눈앞의 저 녀석이 멋대로 자른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 목적이었을 테지만,
에이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며 태세를 갖춰 남자를 노려보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적이지만 기백도, 실력도 출중한 사내임이 틀림없었다.
에이미 역시 이름난 검술 사범 밑에서 오랫동안 수련해 온 까닭에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눈앞의 적은 프로다. 아마도, 아까 만났던 녀석만큼.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채애애앵!
금속이 서로 맞부딪혀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다.
마족 남자가 내지른 공격을, 에이미는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상대는 압도적인 힘으로 에이미를 몰아넣었다. 반격은커녕 방어만 하기에도 벅차다. 힘도 기술도 기량도,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적과는 수준이 다르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방어하던 에이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래가지고선 곧 당하고 말 것이다.
이 정도 기량의 적과 접근전으로 싸우면 절대 이기지 못한다.
-에잇, 이판사판이다!
에이미는 검을 내걸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남자를 쏘아보던 중, 그가 검을 거두었다 내지르는 타이밍을 가늠하여, 그가 휘두른 검을 살짝 비껴가며 크게 뒤로 물러서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다.
중심을 잃고 한순간 휘청이는 모습을 곁눈으로 확인하고서 그녀는 스퍼트를 올렸다.
마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적을 검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도망만 칠 생각도 없지만.
어떻게든 몸을 숨길만 한 장소를 찾아 기척을 죽이고 숨어 상대를 지나보낼 예정...이었다.
어느새 자신과 같은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하는 적을 눈치 채고 무심코 숨을 참아-
그 다음 순간, 가슴 부분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그녀는 성대하게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커헉..."
듬성듬성 솟아난 나무에 등을 부딪쳐 무너져내리며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극한 상황에서 검을 놓치면 죽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검은 에이미의 손에서 벗어나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여자는... 헉... 좀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픔을 달래기 위해 실없는 개그를 하나 던져보았다.
"적에게 남녀 구분은 필요 없지. 살려 둘 가치가 있는지만 판단하면 그만이다."
의외로 대답이 돌아왔다. 내용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네가 모시는 인간의 왕자는 어디 있나?"
남자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마치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인지 묻는 듯 한 일상적인 말투였다.
"그딴 건 몰라... 어째서 내가 알 거라 생각하는 거지?"
에이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쏘아붙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니 상당히 잘 생긴 적이었다. 거리 같은 곳에서 평범하게 마주쳤다면 한번쯤은 뒤돌아 볼 그런 얼굴이었다. 마족이란 걸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곳은 전장.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와는 대조적으로 아무 표정도 들어 있지 않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을 덮은 무감정이 에이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자신을 콕콕 찌르는 살기가, 눈앞의 적에게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밟은 대지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헷갈릴 만큼, 남자의 눈에는 어떤 빛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핏빛과도 같은 레드 아이가 붙잡고 있을 뿐.
욱 해서 덤벼드는 타입이었다면 어떻게든 의표라도 찔러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남자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 같았다. 조용하고 냉정하며 무심한 타입.
...그녀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인간의 왕자는 어디 있지?"
"모른다고 했잖아. 남의 말 제대로 안 들으면 친구들한테 인기 없다고, 아저씨."
"모노 볼트."
대답이나 항의 대신 주문이 에이미를 쓰러뜨렸다.
"젠장...!"
에이미는 잔뜩 인상을 쓰며 손에 힘을 주며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온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 아무래도 주문이 정통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 아저씨가 정말..."
아픔을 참으며 어떻게든 상대를 도발하려던 에이미의 머릿속에서 별안간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하고 많은 단어 중에서, 왜 '그 단어'를 고른 거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남자라서, 아무 생각 없이 갖다 붙인 단어였을 뿐이다.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른,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드는-
그 와중에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에이미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희안하게도, 아무 표정도 없던 사내의 얼굴에 희미한 감정의 빛이 돌고 있었다.
그 빛의 끝이 향하고 있는 곳은 - 에이미가 아닌, 그녀가 차고 있는 마법석.
마계에서 흔하게 굴러다니는 그것을 왜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으로라도 얻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다.
에이미는 슬금슬금 칼자루를 쥐려 손을 뻗었고-
퍼억!
남자는 잠깐 보였던 감정을 완벽히 지우고 그녀를 걷어찼다.
"으윽..."
에이미는 정확히 명자리를 공격받고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공격받은 데미지는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피를 흘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픈 것은 매한가지.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의식 속에서 에이미는 눈앞의 적이 주문을 외우며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몸부림쳤지만 이미 의식은 서서히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가 한 손을 번쩍 치켜듦과 동시에, 에이미는 정신을 다잡던 끈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눈을 뜨자 어쩐지 익숙한 천장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떠 있는 마법의 빛에 눌려 질끈 감았던 눈을 달래 조금씩 깜박여 빛에 익숙해지도록 한 뒤 다시 눈을 뜨자, 이번에는 천장 외의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왕국을 상징하는 장엄한 문장, 바람이라고 불고 있는지, 살짝살짝 흔들리는 창문, 어쩐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서성이는 리제, 자신의 몸을 덮은 붕대의 부드러운 무게...
에이미는 양 손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상체를 일으켰다. 일으킬 때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신음을 흘렸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보다는 상체만이라도 세우는 편이 시야를 더 넓힐 수 있었으니까.
"여긴... 어디지?"
딱히 물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에이미는 겨우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방금 일어난 탓에 머리는 무겁고, 생각들은 뒤엉켜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옆에 사람이 있으니, 복잡하게 머리 굴릴 것 없이 그냥 궁금한 걸 대놓고 묻는 것이 빠르다.
"에이미? 정신이 든 거야?!"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성이던 리제는 동료이자 친구인 기사가 말을 붙이자, 그녀로서는 드물게 호들갑을 떨면서 에이미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다행이다... 괜찮을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혹여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몸은 좀 괜찮아? 다친 덴 어떻고? 근데 방금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
"아니, 별건 아니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던 친구의 의외의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에 밀려 왠지 미안한 어조로 중얼대는 에이미.
환자 주제에 멋대로 일어나지 말라며 훈계하면서도 리제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궁금했지만 미처 묻지 못한 질문까지 술술 답해 주었다.
왕자님과 함께 도망쳐온 병사들에게서 사정을 들었다는 것.
적의 함정에 빠져 혼란스러운 틈 속에서 미끼가 된 그녀 덕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
겨우 태세를 정비하고 임시 기지로 돌아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뒤 둘로 나뉘어 미끼가 되어준 그녀를 찾으러 다녔다는 것.
이미 전사했거나 끌려갔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전투를 벌였던 장소 근처에서 의외로 쉽게 발견했다는 것.
"저기, 잠깐만. 아까 적과 싸웠던 곳 가까이에서 날 발견했다고?"
에이미는 리제의 설명을 끊고 다시 물었다.
"어, 그렇다니까. 난 이번에 기지를 지키는 쪽에 있었으니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널 찾으러 다니면서 그 현장을 보니까 안 봐도 알겠더라. 죽은 동료들 하며, 적이며, 피비린내하며... 아, 적들은 이미 아무도 없었어. 또 함정을 파고 숨어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말야.
그러고 보니까 좀 이상하다. 마족 놈들 입장에서 넌 포로고, 죽은 동료들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 혹시 너 뭐 아는 거 없어?"
리제의 질문에 에이미는 무심코 침묵했다.
아군이 도망칠 퇴각로를 사수하기 위해 혼자 마계의 장군과 맞서고, 죽음의 공포를 눈앞에 두고 뭔가에 홀린 듯 주문을 외워 기적적으로 적들로부터 도망치고, 조금 호젓한 장소에서 이상한 남자와 만났다.
그리고 '그 남자'의 공격을 받아 정신을 잃었지.
-하지만 왜?
에이미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는 왜 그녀를 살려둔 것일까?
'그 남자'와 나는 적이다. 서로를 죽일 작정으로 검을 겨누어야 하는 관계다.
물론 적중에서는 희소성이 있어 포로로 끌려가는 경우도 적잖이 있고, 그런 경우라면 살려두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에이미를 놔두고 가 버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에이미 자신이 정신을 잃은 곳이 아니라, 칼부림을 벌였던 곳 근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남자'는 에이미를 그 부근까지 끌고 왔다가 어째서인지 버려두고 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어쩌면 중간에 수색을 나선 인간군의 기색을 알아채고, 혼자서 싸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려 그녀를 버림으로써 그들의 발을 묶어두고 도망쳤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리 나라도 마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적들과 싸울 순 없어서 도망쳤던 터라... 정신없다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
에이미는 생각을 관두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일단 질문에 대답은 해야 했기에 정확하진 않지만 틀리지는 않은 설명을 살짝 곁들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일이 이렇게 흘러온 것일 터.
머리 복잡하게 생각해 본다한들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올바른 답을 추리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잠시 덮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공격받은 것 외에는 이상한 짓을 당한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무사히 살아남은 지금은 다친 몸을 추스리는 것이 선결 과제.
그렇잖아도 아까 잠시 몸을 일으켰을 때 내부를 찌르는 고통이 에이미를 괴롭히고 있었다. 뼈라도 다친 것일까.
"근데 여긴 대체 어디야? 처음에는 막사인가 싶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 혹시 다른 거점으로 이동이라도 한 거야?"
리제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잠시 에이미를 주시했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너, 병동에는 처음 오는 모양이지?"
"병동?"
"입원 환자들만을 위한 병동. 나르사스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병원의 일부지."
"입원할 정도로 유난 떨 일도 아니... 아얏!"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허세를 부리려던 에이미는 갑자기 파고든 리제의 손길을 느끼고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진 게 유난 떨 일이 아니라고 말할 셈이야? 너 며칠 간 혼수 상태에 빠져서 주변에서 난리도 아니었다고."
"병동이라면... 그럼 우리가 마을로 돌아오기라도 한 거야...?"
"우리가 아니라 '너랑 나' 뿐이지. 왕자님께서 칙명을 내려주신 덕분에 나는 네 호위 명목으로 같이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고... 아, 그렇지."
리제는 침대에 걸터앉았던 엉덩이를 떼어내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왕자님께서 전언을 남기셨어. 얼른 전지로 복귀할 수 있도록 몸조리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말씀하시더라. 주축이 부실하면 마차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나?"
"......"
에이미는 무심코 자신의 하반신을 덮은 모포를 힘껏 움켜쥐었다. 생선 가시라도 목에 걸린 것처럼, 무언가 켕기는 느낌이 별안간 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난 가서 네가 정신을 차렸다고 알려야겠다. 너무 심각한 얼굴 하지 마. 효과 좋은 약들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야."
리제는 푸근한 엄마표 미소를 지었다. 에이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기세 좋게 문을 열었고-
바톤 터치를 하듯 병실에 발을 들인 브라이언과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
"아, 안녕하세요..."
리제는 어깨 밖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에이미는 깨어났나?"
"예? 아, 예! 방금요. 상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막... 알려드리려고 나온 참이었습니다."
브라이언은 리제의 어깨 너머로 딸에게 눈길을 던지며, 무뚝뚝한 투로 말했다.
"고맙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톨버즈 양은 가서 쉬도록."
"예, 알겠습니다!"
리제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직립부동의 자세를 취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무심코 경례를 붙이려 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 방향으로.
타악.
문이 닫히고, 리제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브라이언은 간이용 의자를 끌어당겨 딸의 침대로 다가왔다.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눈초리를 피해 에이미는 무심코 아직까지 자신의 손이 움켜쥐고 있는 모포에 시선을 주었다.
"갑자기 왜 돌아오게 되었는지 설명해 봐라."
브라이언이 명령했다.
에이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어 무거운 침묵의 장을 몰아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편지를 띄운 이후 벌어졌던 전투에서부터, 가장 최근에 있었던 - 자신과 리제가 일시 귀환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적의 함정에 빠졌던 싸움까지.
"...그래서 일단 어떻게든 왕자님의 안전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미끼가 되어 적의 주의를 끌어 위험한 상황을 모면했습니다. 그 뒤에는 저도 어떻게든 도망쳤는데, 도망친 곳에서 갑자기 어떤 마족을 만나서..."
"마족? 누구?"
에이미는 자신과 1:1로 대치했던 마족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뭐라고?!"
콰아아앙!
에이미의 설명을 들은 브라이언은 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먹으로 벽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 아버지...?"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끝장을 내지 않은 거냐!"
"죄, 죄송합니다! 그치만... 마력도 바닥났고, 도저히 저 혼자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비겁하게 변명하지 마라! 군인에게는 핑계도, 못 하겠다는 말도 없다. 안 되면 되게 해야만 한다. 알겠나!!"
브라이언은 연거푸 벽을 치며 고압적인 어조로 딸을 질책했다.
다시 쑤시기 시작하는 상처를 보듬을 새도 없이, 에이미는 이따금 아버지의 눈을 마주쳐 동의한다는 의미의 고갯짓을 보이며 1시간 가까이 계속된 고압적인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설교 중간중간, 어쩐지 격분으로 물든 얼굴 속에 박힌 다색 눈동자 속에 일순 고이 잠든 광기가 이글거리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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