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떠나는 인연, 방심을 타고 파고드는 불화, 머리를 짓누르는 의무,

다수를 위하여 흘린 피는 까맣게 죽어버리고, 소싯적에 정해진 운명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나에게 족쇄를 채운다.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려 하는 자여.

네게 부여된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스스로 내린 선택을 존중하라.

어떤 결말이 그대를 맞이할지라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기를.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 circle of life

 

 

11월의 건조한 태양이 히메미야 마을을 속속들이 비추고 있었다.

투박함 속에 본심을 감춘 하늘은 혹여나 자신의 진심을 들킬까, 은혜를 내리는 햇빛과는 대조적으로 매서운 입김을 뿌렸다.

빛이 파고드는 공간은 따뜻했지만, 그늘진 곳에는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날씨가 변덕이라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사람들은 옷차림에 신경을 쓴 뿐, 밖에 나가고자 하는 바람을 접지는 않는다.

요 근래 마을을 덮쳤던 때 아닌 먹구름이 겨우 물러난 터였다.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두꺼운 옷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한 범위. 옷차림에만 조금 신경을 쓴다면 밖에 나오더라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히메미야 마을의 거리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였고, 그들은 자신만의 목적을 갖고 마을을 돌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소녀 또한 다른 이와 마찬가지.

시선은 손에 든 작은 기계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주변의 사람이나 장애물과 부딪히는 일 없이 묵묵히 자신의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주홍빛 블론드가 이리저리 경쾌하게 춤을 추었고, 석류빛 붉은 눈동자는 때때로 주변을 탐색하듯 가볍게 흔들렸다.

이따금 만나는 아는 얼굴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소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여유를 부렸는지 시간은 소녀의 예상을 제치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가 있었고,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약속 시간에 늦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녀는 손목을 가볍게 감싼 잿빛 가죽 끈에 힐끗 눈길을 주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이러다간 틀림없이 지각하고 말 거야. 지름기롤 가야겠어."

소녀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기계를 주머니에 안전하게 넣고 지름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는 소녀가 몇 분 늦더라도 그녀를 질책하진 않겠지만, 소녀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항상 입장을 바꿔 생각해라, 이것이 소녀 자신의 - 코이소 카고메의 좌우명이었으니까.

하마사키 시에 들어서서 겨우 숨을 돌렸을 무렵, 카고메는 오늘 따라 주변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 특유의 시끌벅적 이는 소리가 아닌, 뭔가를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은 낮은 수군거림.

그 수군거림에 이끌려, 카고메는 서둘러야만 한다는 자신의 상황을 잊고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짓궂은 최면술에 빠져 시선을 돌리자마자, 푸른 바다빛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기본은 서양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른빛이었지만, 그 눈동자는 평번한 파란 색과는 어딘가 달랐다.

자유롭게 뻗은 허니 블론드 속에 감추어진 얼굴 윤곽은 그 사람이 남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봐, 거기 너!"

카고메가 눈길을 돌릴 새도 없이, 시선이 마주친 남자는 검지로 그녀를 똑바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호명했다.

"어... 저 말인가요?"

카고메는 호명당한데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호기심에 이끌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저 난폭한 사람하고 아는 사이인 모양이지?

-세상에,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남자에게 호명당한 순간, 근처에서 수군거리던 시선의 화살이 카고메 자신에게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에는 '저런 사람하고 어울리면 이상한 게 옮아'라는 뜻이 명백히 담겨 있었다.

그녀는 만인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교육 방침 때문에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일면도 가지고 있었으나, 남들의 불편한, 혹은 불쌍한 시선을 받아내기에는 아직 내공이 한참 부족했다.

"그래, 너. 여기 너랑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남자는 '이 남자가 호명한 것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일말의 희망을 주저 없이 짓밟으며 그녀를 향해 이리 오라는 몸짓을 보였다.

이상한 거에 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카고메는 한숨을 쉬며 할 수 없다는 듯 남자의 옆에 섰다.

순간 근처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자신을 지목한 것이나, 그 몇몇 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해 버리는 이유가 뭔지 물을까 싶었지만 곧 그 생각을 버렸다.

그냥 도와줄 것만 도와주고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죠?"

"아, 그래. 여기 사과 그림이 있는 이걸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용 설명서 같은 게 없어서 일단 두들겨 보면 좀 나올까 했는데 소용이 없더라고."

카고메는 남자의 손이 가리킨 곳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여러 가지 음료를 종류별로 품은 커다란 기계 덩어리가 서 있었다.

한쪽 귀퉁이가 뭉그러져 있는 건 그냥 무시하기로 하자.

사람들이 흔히 자판기라고 부르는 녀석이다. 언제 어디서나 돈만 있다면 자동으로 제품을 뽑아낼 수 있는 편리한 기계.

물론 사용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문명을 접하지 못한 미개한 종족이 아닌 이상에야, 자판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었으므로.

철없는 어린 것들이나 술 취한 몇몇 사람들이 자판기를 흔드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고장 낼 기세로 발로 차거나 주먹질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바로 이 남자처럼.

"음, 그러니까... 이건 두들겨 팬다고 나오는 건 아니고... 이쪽 구멍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어야 해요."

벌건 대낮에 이런 짓을 하다니...

전혀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틀림없이 낮술로 만취한 사람이거나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 ㄹ거라 생각하면서도 카고메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사용법을 설명했다.

"동전? 어떤 거?"

"그러니까 100엔이라던가 50엔이라거나... 지금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말하는 거예요."

"난 그런 거 없는데."

"...예?"

돈이 없다고 시원스레 말하는 남자를 보며 카고메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이 사람, 술에 취했거나 바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태껏 돈이 없다고 발길질을 한 거란 말인가?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그래?"

남자의 질문에 카고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약속을 떠올리며 카고메는 요 근래 들어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신을 마음속에서 호되게 나무랐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지, 그 새 흥미를 잃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라졌음에 안도하며 카고메는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고 남자가 주문했던 음료를 꺼냈다.

무시하고 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인 터무니없는 남자는 누군가의 신고로 관리인이 올 때까지 자판기를 망가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왕 손 담근 거, 빨리 뽑아주고 보내버리자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야, 굉장한 걸? 대체 어떤 마법을 썼길래 이리 얌전하게 만든 거지? 여자만 쓸 수 있는 건가?"

카고메가 뽑아주는 음료를 받으며 남자는 신이 난 듯 이것저것 물어왔다.

"아뇨, 뭐 별로..."

카고메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또 마주쳤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으므로)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 말도록 하세요. 재물손괴 행위는 명백한 범죄고, 그런 것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계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고요.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카고메는 빠른 박자로 충고만 던지고 남자의 대답을 듣기 전에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의 바다빛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녀가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남자는 꿈꾸는 듯한 멍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연. 어디에 내놓아도 항상 빛이 나는구나. 의심의 여지도 없이 너라는 걸 한 번에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