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는 없다.

부, 명예, 절세가인, 학식, 기타 등등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어떤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

신데렐라만 하더라도, 왕자님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자존심을 내버리지 않았는가!

신데렐라와 같은 행운을 거머쥘 수 있다면, 나도 그녀가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외전 : 춤추는 칼날 속에 드리워진 감미로운 멜로디(後)

 

 

지구와는 다른 세상,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이(異)세계가 있다고 한다.

인간계, 수많은 이념이 얽혀 온갖 에너지를 뿜어내는 혼돈의 도가니.

요정계, 사시사철 태양의 축복을 받는 아름다운 벌판.

성령계, 망자들의 잿빛 숨결이 하늘을 뒤덮은 황량한 던전.

마계, 거짓 없이 파멸로 이끄는 감미로운 랩소디가 녹아드는 도박판.

천계, 본심을 숨기고 페르소나를 연주하는 가장 무도회.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인간계는 언제나 다른 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4계는 인간계를 중심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힘의 균형을 맞춰 왔다.

허나 원체 서로 간의 신념이 판이하게 다른 만큼, 힘의 패권을 다루는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벌인 소득 없는 싸움에 지친 각 계의 통치자들은 모든 갈등을 뒤로 미루고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굴리지 않아 단단히 굳어버린 머리를 혹사시켰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인간계에서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을 후보로 선정해 프린세스로 등극시키는 것.

5계의 균형에 인간계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만큼, 인간계의 통치자가 그만한 그릇과 능력을 갖고 통치에 임해야 한다는 것은 인지상정.

그러나 인간은 본디 불완전한 존재로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이 점을 벌충하기 위한 목적이 인간 통치자의 프린세스.

프린세스는 통치자의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모성애를 통해 세계의 조화와 안녕을 추구하는 임무를 맡는다―.

인간계의 통치자는 이러한 제안을 내놓았고, 여러 세력이 모여 토의한 결과 좋은 생각이라며 과반수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열이면 열, 제각각 다른 가치관을 가진 생명들이 공존하는 곳에서 만장일치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과반수가 손을 든 제안을 인정하더라도, 반대되는 소수의 제안을 제안한 세력은 반감을 가질 것이다.

프린세스를 지지하는 자가 있다면, 반대로 그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도 있는 법.

그리고 그 소수 세력 중에서 진취적이고 아집이 세며 타오르는 불꽃을 가슴에 품은 자가 있었다.

그 자는 자신 스스로를 조화와 안녕을 거부하며 변화와 개혁을 지지하는 혁명 세력이라 칭하고, 자신의 타고난 언변과 방대한 힘을 이용해 그 밖에 반감을 가진 자들을 쉽게 포섭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키워갔다.

마침내 조직의 기반이 닦이고, 비상시에 언제라도 대비할 수 있는 힘과 물자가 모였을 무렵.

그들의 계획은 그의 지휘 하에 세계의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인간의 수명은 다른 종족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아 자주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해, 기존의 통치자가 후손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시기를 노렸다.

윗세대로부터 힘을 물려받은 후계자가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장을 열 때.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기존의 왕이 후계자의 자질을 심판하는 때에 맞춰 후계자의 안주인 후보가 정해진다.

내로라하는 능력을 가진 여러 여성들이 각지에서 몰려와, 여자라면 한번쯤은 꿈꾸었을 열망을 태우며 자신의 기량을 뽐내어 심사위원의 눈을 현혹시켰다.

엄정한 심사와 허가를 통해 프린세스 후보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혁명 세력은 보란 듯이 그들을 차례차례 죽여 나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프린세스 후보는 그들 나름대로 항거했으나, 그들의 저항 의지는 혁명을 갈망하는 자들의 염원에 미치지 못했다.

증오가 깃든 도신으로 잔혹한 이기심을 채우고, 레이디들이 흘린 피로 목을 축이며 혁명 세력은 마지막 프린세스 후보에게 눈독을 들였다.

더 이상의 사상자를 내지 않기 위한 왕국의 배려로, 혼자 남은 프린세스 후보는 충견과 함께 외로이 자리 잡은 작은 탑에 은신하고 있었다.

혼자서 모든 반대 세력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충견이 그들로부터 마지막 후보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를 둠으로써 후보를 지키려 했다.

하루하루 위태한 삶을 살면서도 애써 웃음을 잃지 않던 프린세스 후보는 그날따라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숙한 잠에 빠져 있고, 그녀의 충견만이 홀로 그녀의 곁에서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시간이 흘러 결국 혁명 세력의 별군이 후보가 숨어 있는 탑으로 포위망을 좁혀 왔고, 주변을 뜨겁게 달군 공기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해갔다.

횃불, 장검, 가시 박힌 철구, 기타 무기를 든 별군이 탑 아래로 몰려들었다. 예산이 부족했는지, 그게 자신 있는 무기였는지 때때로 곤봉이나 작은 나이프 등을 쥔 놈도 있었지만.

굳게 닫힌 문을 원수인 마냥 있는 힘껏 때려 부수고, 고함지르기 대회에 출전하는 참가자 마냥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탑 꼭대기로 돌진한다.

탑의 노후화로 간혹 계단이 무너져 군대의 몇몇이 개죽음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혁명 세력이 프린세스 후보를 도려내기 위해 탑을 완전히 장악하고,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와 함께 마지막 경계선을 넘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오동나무 조각이 마지막 비명과 함께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이마저도 짓밟으며 방으로 들이닥쳤을 때-

방 안의 기척은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살아 있는 자 특유의 기척을 어느 정도 지울 순 있을지 몰라도, 방 안의 공기는 그것과 사뭇 달랐다.

아무도 없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작은 공간이 여러 겹 둘렀던 천을 샅샅이 벗겨내고 탑은 물론 주변까지 샅샅이 뒤져보고 나서야 혁명군은 혀를 깨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고립된 작은 공간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둘.

즉, 하늘로 솟던가 땅으로 꺼지던가.

군대가 득실대던 지면으로 도망가지 않았다면, 사냥감은 하늘로 도망친 것인가.

공중이야 언제라도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자만하여, 그 때문에 오히려 경계가 허술했던 것이다.

분통을 터뜨리는 부하들을 통솔하면서, 별군의 지휘자는 자신의 불찰을 탓하며 상관에게 자신들의 실수를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

"...그들이 아가씨를 습격하기 직전, 제가 아가씨를 데리고 용자님이 계신 세계로 도망쳐 온 겁니다. 바로 여기죠. 즉, 원래는 아가씨가 지금 살고 계신 이 세계가 이(異)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큐브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고, 내 방에는 거북한 침묵이 감돌았다.

별안간 나 혼자 골목에 남겨져 가토라는 망할 이름을 가진 남자와 만나고, 격심한 두통을 느끼고, 갑자기 다시 나타난 엄마와 큐브를 보고 정신을 잃었던 나.

다시 눈을 떠 보니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럴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힘겹게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엄마의 걱정스런 얼굴과 착잡한 표정의 큐브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덮쳤던 깨질 듯 한 두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걱정스런 얼굴로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 엄마와 큐브를 안심시키고-

어쩐지 서로 미묘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방에서 나가려는 엄마와 큐브를 제지하며 나는 목숨을 위협당한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둘 다 얼버무리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기억이 돌아왔다는 내 폭탄선언을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큐브가 엄마의 허락을 받아 나에게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아까와 같은 대사를 끝으로 이야기를 마쳤던 것이다.

"으음... 그렇게 된 거구나. 이제 대략적인 상황은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큐브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세로로 흔들었다.

그나저나 어째서인지 엄마도 큐브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구나.

여태껏 나를 속였던 것에 대해선 화가 나지만, 엄마도 큐브도 결국 날 위해서 그런 거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지 뭐.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나도 참 많이 성장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불편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바꿔볼까 싶어 나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내 진짜 엄마가 아니었고... 난 원래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으로 거기에 진짜 부모님이 계셨고... 난 프린세스 후보 중 하나였는데... 나 말고 다른 후보들과 친부모님은 모두 아까 날 습격했던, 겉모습이야 어쨌든 네이밍 센스 하나는 최악인 그 녀석에게 살해당했다... 여기까지는 됐지?"

"예... 그렇죠."

"그래서 큐브가 마지막으로 남은 후보인 나를 살리기 위해 암살자들을 피해 이쪽 세계로 도망쳐 온 거구?"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내 질문에 엄마와 큐브는 조용히 동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래... 알겠어. 덕분에 엄청난 걸 알았네. 그 왠지 안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 할까?"

"카고메..."

"아, 괜찮아, 괜찮아요.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아직 좀 혼란스러운 것뿐인걸.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엄마에게 손사래를 치는 나.

나는 자조 섞인 미소를 떠올리는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언제 또 그 녀석이 습격할 지도 모르는 일... 아, 그렇지.

"맞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걱정 마세요. 주인님께서 쫓아 버리셨으니까요. 아마 이젠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큐브가 그 답지 않게 애매모호한 투로 대답하며 엄마에게 살짝 눈짓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내 방에서 나간 뒤 둘이 은밀한 곳에 가서 밀담을 나누겠구만...

무슨 얘기를 할 건지, 나한테 안 한 얘기가 있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 알게 된 것만 해도 생각할 거리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큐브가 저렇게 말한다면 일단 지금은 그 녀석을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카고메, 넌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다.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도록 약속할 테니, 오늘 일은 그만 잊어버리고 푹 자도록 해라. 엄마가 하는 말 알겠지?"

"응, 그럴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기특하게도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잠깐만."

난 불을 끄고 나가려는 엄마에게 손짓했다.

"저기 엄마. 엄마는 내가 프린세스가 되길 원해?"

가장 궁금했던 것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를 응시하다 조용히 입을 여셨다.

"지금은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구나.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는 게 어떨까?"

"그렇구나... 나 사실, 아직 좀 혼란스러워서... 프린세스니 후보니 하는 말을 들어도 잘 모르겠어. 이젠 이쪽 세계에 완전히 익숙해졌으니까... 프린세스라니 왠지 현실감이 없는 것 같아. 영국이라면 또 모를까..."

나는 천천히 낮은 어조로 내가 생각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엄마가 또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계속 조용히 듣고만 계신 걸 보니 혼자 불평만 하는 기분이 들어 왠지 머쓱해졌다.

"어쨌든 알았어요, 엄마.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그냥 잘래. 잘 자요."

"그래. 푹 자렴, 카고메."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서야 나는 겨우 긴장된 근육을 풀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래토록 긴장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겠다곤 했지만, 그 녀석 때문에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젠장.

호르몬을 담뿍 받고 한창 커야 할 나이에 잠을 못 자게 만들다니, 만일 내가 키가 작다면 그건 죄다 그 망할 녀석 탓이야. 잔뜩 원망해줄 테다.

"프린세스라 후보라... 내가 정말 프린세스 후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나의 신분을 중얼거려 보았다.

묘하게 리얼한 꿈이라거나, 거짓말 같은 건 아니다.

그 녀석이 흔들던 방울 소리에 뒤섞인 단말마의 비명소리. 바로 어제 겪었던 것처럼 생생한 느낌.

잔인한 선율은 상처를 헤집고 채 응고되지 않은 피를 뽑아냈다. 한껏 정신줄을 놓았다가 눈을 뜨니, 의식이 더욱 더 또렷해졌다.

망자들의 구슬픈 애환이 귀를 통해 파고드는 것 같다.

이런 느낌들이 거짓말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

"별도로 다른 후보를 뽑지 않았다면 진짜 후보는 나 하나뿐이네... 노력하면 프린세스가 될 수 있는 걸까?"

만약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정말 나중에 왕자님이 나타나서 동화 속 거짓말 같은 프러포즈를 해준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