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아가씨의 동태가 좀 수상하다.
모처럼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갔다 오시질 않나, 집에 들어와선 식사 때 말고는 계속 방에 틀어박혀 계시질 않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묻고 다닌다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1447년 5월 31일, 큐브의 집사 일지에서

 

 

"아가씨,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큐브는 자신이 깍듯이 모시는 여주인의 얼굴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별 일 없었어, 큐브. 정말이야. 괜히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분란 일으킬 생각 하지 말고, 너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키르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별 일 없다고 치부하기에는... 머리도 산발이시고 옷에도 먼지가 한 가득 내려앉았는걸요. 누구랑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아, 거 참...!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냥 좀 넘어진 걸 갖고 왜 그래? 말하기 창피해서 어떻게든 얘기를 얼버무리려고 하는데, 꼭 옆에서 초를 쳐야겠니!"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정확하게 정답을 집어내는 큐브의 대답(그래봤자 우연이겠지만)에 뜨끔한 키르셰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니, 뭐... 별 일 없으셨다면 다행이지만요..."

예상보다 완강한 키르셰의 태도에 놀란 큐브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말끝을 흐렸다.

"아, 아무튼... 난 가서 씻고 방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큐브도 가서 볼 일이나 보도록 해. 그리고... 아까 언성 높여서 미안해."

자신을 걱정해 준 집사에게 화낸 걸로도 모자라 무심코 거짓말까지 했다는 죄책감에 키르셰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사실을 밝히면 왕비님의 의뢰를 받은 것부터 시작해 다크타운에 들어갔던 얘기까지 끄집어내야만 하지만... 입이 찢어져도 그럴 수는 없었다.
뭔가 석연찮은 기색을 떠올리는 큐브를 남겨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던진 키르셰는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궈버렸다.
-후우, 내가 생각해도 너무 궁색한 변명이었어...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둘러댈 말을 생각해 두었어야 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한 키르셰는 일단 옷을 갈아입기 위해 늘 입고 다니는 평상복의 타이를 끌러냈다.

"저기..."

끌러낸 타이를 바닥에 흘려놓은 뒤 첫 번째 단추에 손을 가져갔을 때, 키르셰는 방 안에서 뭔가의 소리를 들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불렀나?
혹시 큐브가 방까지 따라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본 키르셰는 단단히 잠겨 있는 방문을 확인하고 자신의 판단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큐브가 부른 것이라면 용건을 말하기에 앞서 자신이 찾아왓다는 의사 표시 - 노크부터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금 들은 목소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키르셰가 서 있는 방안에서 들린 것 같았다.

"큐브...는 아니고, 누구지?!"

키르셰는 불안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저기 말이야, 나야 나. 여기 있잖아. 계속 부르고 있었어."

방 안을 뒤엎을 기세로 두리번거리던 키르셰의 눈에 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없는데...

"혹시... 곰?"

키르셰는 무심코 의자 위에 올려둔 곰 인형에 눈길을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까...

"우후후... 맞았어. 이제 들리는구나."

차라리 자기가 환청을 들었다는 설이 훨씬 설득력 있을 거라며 멋대로 납득하려던 그녀는 쉽사리 긍정하는 곰 인형의 목소리에 말을 잃었다.

"설마... 진짜로 곰이 말하는 거야?"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볼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보고 나서야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키르셰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훗, 그렇다니까. 난 계속 널 부르고 있었는데, 넌 이제야 내 목소리가 들렸나 보구나."

키르셰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끼고 다녔던 푸른 곰 인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속 부르고 있었다고...? 하지만 난 네 목소리를 오늘 처음 듣는데... 왜 지금까지는 들을 수 없었던 거지?"

곰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인형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법교실을 운영하는 카이 사범님께선 마법으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 어쩌면 곰 인형이 말을 하게끔 조치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마 전 주인이 마도사였거나 했던 모양일 테지.
처음에는 놀랐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키르셰의 심장도 안정을 되찾아갔다.
심장이 안정을 되찾으니 머리도 한결 맑아졌고, 머리가 맑아지니 갑자기 닥친 현실을 보다 부드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키르셰는 인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 여지껏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단 건 봉인이든 뭐든 너와 나 사이를 뭔가가 가로막고 있었단 건데... 무슨 이유로 그 벽이 깨진 게 아닐까?"

곰 인형은 갑자기 개가 냄새를 맡듯 고개를 들어 코를 킁킁거렸다.

"왜 그러는데?"

"왠지 익숙한 냄새가 나... 혹시 오늘 누구를 만났니?"

"글쎄, 오늘은 계속 마을을 돌아다녀서 만난 사람은 많았지만 딱히 약속을 하고 만난 사람은 없었는걸."

"아닌 거 같은데... 분명 누군가를 만났어... 아주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냄새가 나..."

곰 인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지 않아? 생각해 봐도 모른다면, 생각해 봤자 소용없잖아. 그것보다 네가 말할 수 있다는 거 나 말고 아는 사람 있어?"

"없을 걸. 난 계속 네 방에 있었으니까. 게다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입 꾹 다물고 있었는걸."

"으음, 그래...?"

키르셰는 입 꼬리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나 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 그거지.

"왜?"

"아냐, 아무것도, 그럼 너, 앞으로도 나랑 있을 때 빼곤 보통 평범한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거라는 뜻이야?"

"아마 그렇게 되지 않겠어? 듣는 사람도 없을 거고, 또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니까 말야."

"그래? 잘됐다~"

별안간 키르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곰 인형을 냅다 끌어안았다.

"알겠어? 이건 나하고 너만의 비밀이야. 나도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너도 나랑 있을 때 말고는 절대 말하지 마. 그렇게 해 줄 거지?"

"그렇게 하건 말건... 여태껏 그래 왔는데."

"좋아! 약속한 거다?"

키르셰는 다짐을 받고서야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넌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생겼잖아. 친구야 다른 사람들은 있지만, 비밀을 속속들이 공유할 만한 친구는 없었거든. 비밀을 갖는 건 좋지만 혼자 입 다물고 있자니 답답한 참이었는데 당연히 좋지!"

키르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뭔가를 감추는 듯 한 아버지처럼, 이제 나도 비밀을 손에 쥐었어.
초상화에 대해 캐묻자 화를 내셨던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거리를 찾은 것만 같아, 키르셰는 저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 밀은 혼자만 간직하고 있어야지.

 

 


"키르셰 씨? 여기입니다."

키르셰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샤를 씨. 갑자기 전서구를 보내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샤를이 보낸 편지 한 장을 손에 쥔 채 키르셰가 말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맑은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 과거 몰리뉴 왕국을 구해 낸 여전사의 모습을 본뜬 대리석 동상, 제각각의 사정을 품고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
조금 전.
평번하게 식사를 마치고 교양이론 수업을 위해 밖으로 나가려던 키르셰에게 도착한 비둘기 한 마리.
다리에 매달린 양피지 한 장이 비둘기가 찾아온 목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편지를 읽은 키르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일정을 바꿨다.
충실히 기다리는 전서구의 편에 샤를의 부탁에 응하겠다는 전갈을 끼워 보낸 후, 자신의 사정을 간략히 적은 편지를 들고 도구점에 달려가 예술 활동에 매진 중이었던 마리를 붙들고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하루만 교양이론 사범 대타를 뛰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사실 상대의 계획 따윈 안중에도 없이 당일에 불쑥, 그것도 직접 찾아오는 게 아닌, 전서구를 통해 나와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면 보통은 거절하겠지만...
전갈을 보낸 사람이 왕자라면 문답무용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 학생들로 빽빽이 들어찬 교실에 갇혀, 성큼 다가온 초여름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태양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보다는 친구하기로 약속한 왕자님과 약속을 잡는 편이 훨씬 즐거울 거라는 타산도 크게 작용했지만.
겨우 일정을 맞추고 샤를이 기다리고 있는 광장으로 달려가-
분수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샤를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습니다. 급한 마음에 불러내긴 했는데 혹시 저 때문에 스케줄이 틀어진 것은 아닌가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했거든요."

키르셰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것보다 어딜 가시던 중이라고 쓰셨던 것 같은데요."

"네, 뭐...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길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설마... 길을 잃은 건가요?"

"그 말대로... 부끄럽습니다..."

샤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듯 한 웃음을 띠었다.
장차 나라를 다스릴 왕위계승자라는 사람이,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마을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니. 얘기를 들은 누군들 웃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키르셰는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릴 뻔 한 입을 단속하며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
실수로라도 솔직하게 '어린애도 안 하는 실수를 하시다니 우습네요.'라고 말할 경우 왕족을 모욕한 죄목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키르셰는 만물을 아우르는 어머니 대지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익숙하지 못한 곳에서는 누구나 헤매는 법이니까요. 저도 가끔은 길을 잃기도 하는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마음이 편하군요."

샤를은 키르셰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이며 경직된 미소를 풀었다.

"그런데 원래 어디로 갈 생각이셨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실은 마을에 있는 교회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거든요."

"마을에 있는 교회요?"

키르셰는 무심코 되물었다.
다른 곳은 어떨지 몰라도 몰리뉴 왕국에 잇는 교회들은 하나같이 높은 지붕에 커다란 십자가를 매달고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편인데...
그 교회로 가는 길을 몰라서 날 불러낸 거란 말인가, 이 왕자님은?

"키르셰? 왜 그래요?"

샤를에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교회라기에 혹시 톰스 사교님이 계신 성 안에 잇는 교회를 말씀하시는 건가 싶어서요."

"아, 아닙니다. 마을에 있는 교회입니다. 한 곳밖에 없다는데 꼭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아, 예. 그럼 가시죠..."

키르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안내를 위해 앞장섰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하면서.
아무래도... 말하는 인형에게 털어놓을 비밀 이야기가 하나 더 늘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