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로버트 퍼시그

 

 

"틴시클 양, 오랜만이에요. 기도는 착실히 하고 있는 건가요?"

샤를과 함께 교회를 찾은 키르셰를 알아 본 에바 수녀가 그녀를 향해 알은체를 했다.

"죄송해요, 수녀님. 요새 좀 바빠서 나올 틈이 없었어요."

"교회에는 나오지 못하더라도 기도는 자주 하세요. 대화를 자주 하셔야 신께서 틴시클 양을 굽어 살펴주실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수녀님..."

그다지 신을 믿는 것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키르셰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시죠? 혹시... 남자친구?"

에바 수녀는 키르셰의 뒤를 따라온 키가 훤칠한 금발 청년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뇨, 키르셰 양과는 그냥 친구입니다. 실은 그녀에게 이 곳을 안내받았거든요. 예배당을 한 번 둘러보고 싶은데... 혹시 폐가 될까요?"

"폐라니요. 오늘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 날이라서 아무도 없지만... 언제 찾아오시든 신께서는 항상 신도들을 환영하신답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에바 수녀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흔쾌히 수락했다.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샤를과 키르셰는 정적만이 감도는 조용한 예배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곳의 신도 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군요..."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구속당한 채로 잠 든 신의 형상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던 샤를이 갑자기 툭 하고 한 마디를 흘렸다.

"그런가요? 저는 아직 성 안의 교회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보통 교회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지어지지 않았을까요..."

"키르셰 양은 세례를 받지 않았나요?"

"3년 전에 받았어요. 하지만 그 때는 톰스 사교님께서 직접 이 교회까지 오셔서 세례를 내려 주셨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갔었는데, 사교님께서 아버지께 제 장래에 대해 직접 언급하셨죠."

"그래요? 그 분은 어지간해선 그런 말씀을 잘 안 하시는데... 뭐라고 하셨는데요?"

키르셰는 회상의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 과거의 기억을 꺼냈다.

"그냥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제게 신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셨어요."

"아버님께선 거기 찬상하셨나요?"

키르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희망이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죠."

'훌륭한 아버님이시군요."

샤를이 감격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끝으로 키르셰와 샤를 사이에는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키르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샤를이었다.

"아까 우리가 광장에서 만났을 때 분수대 옆에 세워진 대리석 동상을 봤죠?"

"네... 광장에서 제일 눈에 띄는 명물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왜요?"

샤를은 심란한 눈초리로 신의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동상은 말입니다. 실제 존재했던 영웅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던 겁니다. 약 200년 전에 몰리뉴 왕국의 누군가가 금기를 어겨 신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는데, 그 영웅이 직접 신과 교섭하여 분노를 잠재워, 신이 심판을 내리려는 걸 저지했다고 합니다..."

키르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라면 니엘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 몇 번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영웅의 이름은 분영... 스칼렛 티타니아 리파인.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녀는 인간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천제가 내려 보낸 분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200년 전 몰리뉴 왕국을 위협했던 마왕의 난을 진압한 유력의 검사의 딸로 입양되어 인간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도 괜찮은지 판단하기 위한... 정식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왕실의 기록에도 그 내용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실제로 신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선 거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천계 출신이라는 뜻이 되겠죠?"

"네... 그럴 거예요. 실제로 전설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기도 하구요..."

키르셰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샤를이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겐... 스칼렛 님과 같은 영웅이 필요합니다."

샤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샤를 씨...?"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지만, 그 존재 여부조차도 불분명한 신보다는... 스칼렛 님처럼 진정으로 왕국을 위해 움직이는, 그런 영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강대한 힘으로 마족을 몰아내는 것이든, 마족과의 싸움을 멈추고 서로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든...!"

샤를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내리쳤다.
그는 마치, 키르셰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 얽히고 설킨 응어리를 혼자맛을 하듯 풀어내는 것 같았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신이 기꺼워하며 뭔가를 해주는 건 아닙니다. 그저 방관만 할 뿐이죠. 신을 떠받들어 모신다고 해서 사지로 나간 백성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샤를은 뭔가에 홀린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뭔가를 해내려면... 결국 직접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과 직접 담판을 지었던 영웅 스칼렛처럼... 직접 행동에 나서야만 해...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

키르셰는 발걸음을 죽여 차분히 뒤로 물러서, 샤를이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딱히 무슨 말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마음속을 훔쳐본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감정이 흐트러졌는지는 몰라도, 잠시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머, 틴시클 양. 왜 혼자 나왔어요? 함께 온 신사 분은요?"

교회 앞마당으로 나온 키르셰를 발견한 에바 수녀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 한다고 얼버무리던 키르셰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두 손님이 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자신들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찾아온 것이리라.
키르셰가 어렸을 때 체력을 기르기 위해 가끔 알바하러 갔던 농장의 주인 하무르와, 외출을 나갔을 때 광장이나 거리에서 가끔 마주쳤던 올드먼 할아버지였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키르셰에 하무르가 말을 걸어왔다.

"틴시클 양, 안녕.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구나."

"예... 감사합니다, 하무르 씨."

"그러고 보니 하무르 자네는 왜 결혼을 안 하나?"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올드먼 할아버지가 하무르를 향해 화살을 돌렸다.

"결혼을 뭐 혼자 합니까... 상대가 있어야지요. 게다가 요즘은 세금이 올라 농장 경영이 어려워져서 다른 데 신경 쓸 여력도 없습니다. 후우..."

하무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쯧쯧, 그건 다 핑계라네. 아,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인연이 알아서 찾아오나? 누가 와서 떠먹여 주길 기다릴 게 아니라 자네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지!"

"하지만... 저 같은 놈을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습니까? 시커먼 얼굴에 패션이나 유행과는 담 쌓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집정관님께서 농장을 시찰하러 오셨었는데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구요. 잘 생기고, 서글서글하고, 백성들 말에 귀 기울여 주시고... 그런 분은 분명 인기도 많을 거예요. 하아, 부럽다..."

-우와, 어두워...
키르셰는 무심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자신한테까지 우울증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아, 젊은 놈이 그리 패기가 없어서야 쓰나! 좀만 기다리게. 지금은 사회가 불안해서 그래.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면 여자는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을 걸세. 한창 전쟁 중이라 사람들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 뿐이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게나."

올드먼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역... 역시 그렇죠? 나한테 연인이 없는 건 다 마족들 탓이에요!"

"맞아요. 마족들은 이 세상에 창궐하는 만악의 근원이 틀림없으니까요! 하무르 씨 같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마족들을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바 수녀도 가세했다.

"암, 그래야지. 마족과의 전쟁은 두려워해선 안 되고말고. 뭐,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난 번 마족과의 전쟁에서도 국왕 폐하께서는 그야말로 용감하게 싸워 마족을 쫓아내셨거든. 이번에도 결국 그렇게 될 게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마족이 아무리 저항해 봤자 우리 인간에게 이길 리가 없죠."

어느 새 이야기는 전쟁과, 인간과 교전 중인 마족의 험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세 사람이 사회 정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듣던 키르셰는 기분이 가라앉다 못해 묘하게 수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왠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서서히 부아가 치민다.
방금 예배당에서 고뇌하는 샤를의 심정을 엿봤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인간과 대적하는 마족에게 화가 나야 정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감정은, 적어도 마족을 향해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저기, 저는 아무래도 잠깐 안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혹시라도 자신에게 동의를 구할까 싶어, 키르셰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샤를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진정되었기를 바라며 예배당 문을 열려던 키르셰는 별안간 안쪽에서 열린 문 때문에 하마터면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아, 키르셰. 여기 있었군요. 갑자기 없어져서 찾으려던 참이었어요."

아까보다는 좀 괜찮아 보이는 얼굴의 샤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죄송해요. 말도 없이 나가 있어서... 하지만 샤를 씨가 너무 심란해 보이셔서, 잠시 혼자 두는 게 나을까 싶어서 그만..."

키르셰가 샤를의 눈치를 보며 어물거렸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레이디꼐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샤를의 행동에 당황한 키르셰는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아, 아녜요!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숙녀 분께 사죄하는 뜻으로 제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키르셰, 부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이에요, 샤를 씨."

마침 교회를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였으므로, 키르셰는 별 생각 없이 바로 승낙해 버렸다.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일단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음? 왜 그러죠, 키르셰?"

그녀의 속마음이 얼굴로 드러났는지 샤를이 이상한 듯 물었다.

"아, 아니에요. 샤를 씨. 그럼 갈까요?"

키르셰는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불쾌한 기운을 애써 밀어 넣고, 샤를을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