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버지께 야단을 맞았다.
지붕의 끝에서 끝까지 무사히 걸어갈 수 있는지 리제와 말싸움을 하던 중,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며 지붕에 올라서던 걸 들켰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며 변명했지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내가 변명했던 시간만큼 아버지께서는 나를 앉혀놓고 잔소리를 하셨기 때문이다.
호기심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며, 아버지께서는 자중하라는 설교를 늘어놓으셨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언젠가 그 호기심 때문에 큰 코 다칠 날이 올 거라면서.

-1440년 11월 8일, 키르셰 틴시클의 일기장에서

 

 


7월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장마 전선이 성큼 다가온 탓에 이글거리던 태양은 영원할 것 같았던 위세를 모두 잃고 천둥 번개를 머금은 뜨거운 먹구름에게 도리 없이 자리를 내줬고, 회색 전선과 후덥지근한 바람이 태양 대신 날뛰기 시작했다.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을 피해 아낙네들은 우물가를 떠났고, 거리에 들어선 노점과 가게들도 일찌감치 셔터를 내렸다.
집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행여나 비가 들이닥칠까 싶어 벌써부터 문과 창문을 걸어 잠궜고, 아직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거처를 찾는다.
그 와중에, 키르셰는 종종거리며 귀가하는 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보수집을 위해 들렀던 다크타운으로.
혹시나 비가 내릴 것을 대비해 가져온 크리스탈 화이트 빛 우비를 몸에 둘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굴을 전부 가릴 만큼 푹 뒤집어 쓴 그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는 한없이 수상했지만,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데다 거리에 얼마 없는 사람들은 각자 제 갈길 가기에 바빴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상갓집에 가셨으니 아마 오늘은 돌아오질 않으실 테고, 큐브는... 들키지 않도록 창문으로 빠져나왔으니까 한동안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저만치 다크타운이 가까워 오자 키르셰는 꿀꺽 침을 삼켜 마음을 다잡았다.

"여어, 아가씨. 어째 자주 보는 것 같다?"

여느 때처럼 문지기가 말을 걸어왔다.
키르셰는 '남이사 무슨 참견이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통행료를 내밀었다.
이제 곧 저 문지기가 통행료를 받아들면 그녀를 통과시켜줄 거고, 그럼 난 여느 때처럼 저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됐어."

뜻밖에도 문지기는 키르셰가 내민 통행료를 거절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이자 키르셰는 재미있을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왜죠? 설마... 안 들여보내주겠다는 건가요?"

키르셰는 살짝 몸을 떨며 질문을 던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내가 다크타운에 들어갔다는 걸 아버지께서 아시고 금지령을 내리신 게...?

"그 반대야, 아가씨. 아가씨는 이미 우리들과 마찬가지나 다름없는 인간이니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키르셰를 흘깃 주시한 문지기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쉽게 말해 아가씨는 이제 언제 여길 드나들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 말이야. 그냥 들어가."

"진짜죠? 누가 못 들어가게 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확인 차 묻는 키르셰.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적어도 난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 뭐, 금지령에 대한 얘기를 들었든 말았든 안에 들여보낼지 여부는 어차피 내가 판단하는 거니까 상관없지만."

"다행이다..."

키르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여기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헛갈렸지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참, 문지기 씨는 다크타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시죠?"

키르셰는 문득 생각났다는 식으로 물었다.
이 문지기는 다크타운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가 막히도록 잘 알아보았다. 누가 몇 번째로 드나들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부분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걸로 봐선 의외로 머리가 좋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라면 아마 키르셰가 다크타운을 찾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

"잘 안다고는 할 수 있지. 여긴 내 앞마당이나 마찬가지니까. 왜, 누구 찾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키르셰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실은... 그래요. 그러니까... 키가 굉장히 크고,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예요."

"키가 크고 무뚝뚝하다."

문지기가 그녀의 말을 따라했다.
키르셰는 적절한 손짓 발짓을 넣어가며 다크타운에서 자신을 구해 줬던 남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아는 대로 묘사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다크타운을 찾은 목적이었다.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던 남자에 대해 조사하는 것.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났을 당시에는 조금 신경 쓰였지만, 시간이라는 우월한 마법사 앞에선 결국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아마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면 키르셰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쫓겨났겠지만...
얼마 전, 크리스티나의 생일을 기념으로 초대받은 노더리 가 소유의 개인 해수욕장에서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던 중 언급된 이상형과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사라져가던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들었던 것.
한 번 궁금하게 여긴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탓에, 키르셰는 일전에 그 남자를 다크타운에서 만났었단 걸 기억해 내고 다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아, 그리고... 큰 검을 등에 지고 있었는데, 외견과는 달리 별로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어요."

키르셰가 마지막 말을 덧붙이자 문지기가 옳거니, 하고 탄성을 질렀다.

"큰 칼을 등에 지고... 아가씨는 그 사람이랑 얘기한 거야?"

"네, 뭐. 조금이지만요... 알고 있나요?"

"그 사람은 바로아야."

예상대로라고 할 지, 문지기는 너무나도 쉽게 키르셰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바로아 씨?"

앵무새처럼 따라 되묻자, 문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명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이름이 맞을 거야."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지 않는 것이 다크타운의 규칙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설사 안다고 해도 말할 수 없어. 그래도 아가씨를 위해 한 마디 하자면... 그래. 다크타운에는 다양한 녀석들이 모인다고만 해 두지."

"다양한 녀석들?"

"뭐, 지금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것보다 어쩔래? 들어갈 거야?"

키르셰와 대화하는 것이 질렸는지, 문지기는 본연의 목적 수행을 위한 질문을 던졌다. 키르셰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크타운은 무서운 곳이야... 하지만 무서운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오게 되는 걸...
가뜩이나 햇빛을 받지 못하는 다크타운은 저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보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한층 더 상승해 있었다.
그래도 저번에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는데,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찾은 걸까...
키르셰는 내심 후회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날씨를 고른 것까지는 좋았다.
전혀 예상하진 못했지만, 더 이상 다크타운을 드나들기 위해 통행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좋았다.
비 맞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 주는 것까지도 좋았다. 그렇지만...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는 법.
키르셰는 멍청하게도 자신이 찾으려는 남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건물이며 땅바닥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음산한 냉기를 애써 뿌리치며 다크타운을 돌았음에도, 바로아라는 남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저번에 테츠라는 정보원을 찾으려 할 때도 그랬지만... 묘하게 내가 찾으려는 사람은 앞에 나타나 주질 않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상념에 젖어 터덜터덜 걷던 키르셰의 머리 위로 툭 하고 차가운 분자가 내려앉았다.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대처하기도 전에.
느닷없이 굵직한 빗발이 대지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크, 비 온다...!"

자신의 팔이며 등이며 머리를 세차게 내리갈기는 비를 피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키르셰.
먹구름이 몰고 온 것은 비뿐만이 아니었는지 하늘 저 편에서 번쩍 하고 커다랗게 빛을 그려 나무를 강타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떻게든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의 술집을 간절히 두들겨 보지만, 키르셰의 외침은 덧없이 흘러 허공으로 흩어질 뿐.
우비를 챙겼기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는 것만은 겨우 면했지만, 한치 앞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는 미처 우비로 감싸지 못한 부분으로 파고들어 특유의 잇자국을 남겼다.
어찌 됐든 이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는 건 현명치 않다며 다른 곳을 찾기 위해 돌아서려던 찰나, 갑자기 불어 닥친 드센 강풍이 그녀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벌써 푹 고이기 시작한 웅덩이도 가세하여 한순간 비틀거리는 키르셰.
다음 순간, 꼴사납게 넘어질 거라고 반쯤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을 때-
그녀의 허리를 잡아챈 강한 힘이 그녀를 어딘가로 끌어당겼다.
-방금까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는데... 대체 누가?!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우악스런 손 때문에 입술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뭐야... 왜 내가 여기 올 때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바로아 씨를 찾으려는데 힘을 보탰던 호기심은 순식간에 사그러들고 공포심만이 남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의 힘이 너무 강해 전혀 손쓸 도리가 없었다.
목에 칼을 겨누는 정도라면 어떻게든 의표를 찔러 주문이라도 외워보겠지만... 이렇게 제대로 막혀 있어선 그것조차도 무리였다.
강한 힘은 모든 것이 하얗게 날아가 버린 머리 속에서 그저 살고 싶다는,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터인 생존 본능이라는 녀석 덕에 겨우 정신을 유지하는 키르셰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끌려가길 수십 초, 느닷없이 그녀를 구속하던 거친 힘이 마치 눈 녹듯 사라졌고, 키르셰는 짤막한 틈을 이용해 자신을 끌고 온 미지인에게서 떨어졌다.

"이봐."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중저음의 둔탁한목소리가 키르셰를 향해 다가왔다.

"뭐, 뭐야...! 당신 대체 누구야!"

겨우 떨어지긴 했지만, 자신을 끌고 온 미지인과 아직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난 공포심을 부추겼다.
반쯤 패닉에 빠져 양 팔을 거칠게 흔들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발버둥을 멈추게끔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좀 차려라."

주인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던 손목을 잡아채 앞으로 끌어당기는 움직임.
살짝 실눈을 뜬 키르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가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데도 놀랐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끌고 온 미지인이 바로 자신이 찾기 위해 다크타운에 들어오게끔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당신은 지난 번... 그러니까... 바로아 씨라고...?"

문지기에게서 들었던 이름을 힘없이 중얼거린다.
자신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일까? 일순간 남자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신기하군. 내가 언제 네게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있었던가?"

듣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는 그대로다. 키르셰는 한 발자국 물러나면서도 모기만한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들었어요. 여기서 알게 된 사람에게서... 그런 것보다, 어째서 갑자기 절 이런 곳으로 납치한 거죠?"

어느 정도 진정되자 부풀었던 공포심은 바람 빠진 풍선마냥 자취를 감추고 당혹감으로 무장한 분노가 치솟아, 키르셰는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앙칼진 그녀의 대꾸에도 아랑곳없이, 바로아는 무심한 투로 말을 받았다.

"납치라니 말이 심하군. 멍하니 서서 비를 맞고 있길래 구해준 것뿐이었는데, 세간에선 그런 걸 납치라고 말하나 보지?"

바로아는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인 키르셰의 등 뒤를 가리켰다.

"단순히 비를 맞고 싶었던 거라면 내가 주제넘게 끼어든 게 되겠군. 바로 뒤에 입구가 있으니까 원한다면 지금 바로 나가도 상관 없다."

"그, 그럼... 아까는 왜 제 얼굴을 가렸던 건데요? 그냥 따라오라고 얘기했어도 됐잖아요!"

"분명히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네가 가만히 있길래. 폭우 속에 내버려 두는 것도 뒷맛이 나쁘고. 얼굴을 막은 건 비에 맞을까 봐 엉겁결에 그랬던 건데... 생각해 보니 확실히 오해를 살 만했군. 미안하다."

키르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멋대로 오해해서..."

키르셰는 나직하게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부끄러움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어째서 매번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기껏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을 납치범이라고 매도하질 않나, 호기심에 찾으러 와 놓고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질 않나.
한 순간에 찌질이로 변해버린 자신이 답답했다.

"대충 오해는 풀린 것 같군.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오는데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지?"

바로아가 다시 화제를 돌려준 덕에 키르셰는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말 못해... 바로아 씨를 만나러 찾아왔다가 비나 쫄딱 맞고 기껏 만난 사람을 납치범 취급했다고는 절대 말 못해...

"그게... 무슨 용무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키르셰로서는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용무도 없이?"

바로아는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며 탐색하는 듯 한 시선으로 키르셰를 훑어내렸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살짝 겁을 먹으면서도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참, 간이 큰 건지, 조심성이 없는 건지... 알겠어? 다크타운에는 위험한 인간이 많다. 저번 사건으로 깨달았을 줄 알았는데."

바로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나 같은 마족도 섞여 있어. 다크타운이 인간들이 사는 마을이라고는 해도, 너 같은 사람이 돌아다닐만한 곳이... 음? 왜 그러지?"

키르셰의 얼굴에서 이상한 빛을 감지한 바로아가 물었다.

"저기... 바로아 씨는... 마족이었나요?"

잠시 동안, 구멍이 뚫린 하늘에서 대지를 때리는 빗소리만이 들렸다.

"이런... 그런 것도 몰랐었나?!"

바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갑작스런 일갈에 놀라기보다도, 키르셰는 저 무표정한 남자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어 무심코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전 그냥... 좀 특이한 사람인 줄만 알았어요. 설마 마족이라곤..."

키르셰가 사실대로 말했다.

"뭐 됐어... 그것보다 넌 아무렇지도 않나?"

"뭐가요?"

"나 말이다. 난 너희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마족인데, 아무렇지도 않느냔 말이다. 무서워하든가, 도망치든가, 죽일 작정으로 덤벼오든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그제서야 키르셰는 바로아가 하려는 얘기를 알아챘다.

"그야 그럴 지도 모르지만... 그건 실제로 경험한 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 만난 마족은 바로아 씨가 처음인데... 그...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들고요..."

"이유는 그것뿐인가?"

"아뇨, 하나 더 있어요."

키르셰가 단호하게 말했다.

"바로아 씨가 마족이라고 해도, 절 구해준 은인이라는 점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에요. 게다가 인간 중에도 나쁜 사람은 분명 존재하고... 그러니까... 뭐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건 어렵지만..."

키르셰는 뚱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것 참... 이것도 혈통인가..."

바로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 뜻을 품은 함축적인 말이었지만, 키르셰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머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잠깐... 바로아 씨는 마족이라고 하셨죠? 그럼... 마계에서 오신 건가요?"

"그래. 그게 뭐?"

키르셰는 일전에 나눴던 마리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어떻게 얘기를 꺼내면 좋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뭔가 굵직한 일이 한꺼번에 터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이대로 날려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까웠던 것이다.

"그게... 마족이라고 하니까 왠지 궁금해져서요. 마계가 어떤 곳일지 라거나..."

"...뭐라고 할까. 이런저런 녀석들이 마계 곳곳에서 살고 있지. 인간들처럼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사는 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구나... 학교에서 배운 얘기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듣기론... 굉장히 비참한 곳이라던데."

키르셰는 혹여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싶어 조심조심 단어를 골랐다.
바로아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얘기하는 게 당연하지. 너희들 시각으로 보자면 적진이나 마찬가지다. 무서워하고 증오하도록 세뇌시켜야 나중에 여차했을 때 선동하기 쉬울 테니."

공포심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것들을 조종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빠른 무기라고 덧붙인 바로아는 하고 싶은 말을 참기 위해 우물거리는 키르셰의 표정을 잠시 살피고 지나가는 투로 내뱉었다.

"아무래도 마계에 흥미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궁금하다면 입구를 가르쳐 줄 테니 한 번 들어가 보든가. 마계는 다크타운 이상으로 위험하니까 항상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말이다."

"정말 그래도 돼요? ...그치만 마계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기서 굉장히 멀 것 같은데요."

바로아의 말을 듣자마자 키르셰의 눈동자는 처음으로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곧, 마계로 이어지는 입구는 성 밖에 존재하는 타마란 사막 한가운제의 동굴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흥, 설마 그 먼 거리를 매번 걸어 다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따로 문을 만들어서 그 쪽으로 드나들고 있다."

"거기가 어딘데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아. 다크타운 외곽에 있는 낡은 오두막에 있다.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곳이지만, 그 때문에 인간들의 발길이 끊어졌으니까 나로선 잘 된 셈이지. 찾는데 별로 어렵지는 않을 거다."

바로아는 키르셰에게 오두막의 대략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바로 입구가 보이는 건가요?"

키르셰가 물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보통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주문을 걸어 두어서 마력 탐지에도 걸리지 않아. 하지만 너라면 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 사용하는데 별 무리는 없을 거다."

"어...? 제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바로아는 의외라는 눈초리를 그녀에게 보냈다.

"저번에 내가 마법을 쓰는 것을 보고 네 스스로 방어하지 않았었나? 주문을 외운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정도라면 주문을 구성하는 카오스 워즈는 통달했다는 뜻일 테고,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느 정도 마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나?"

"그런가요..."

키르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1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인간들의 동향에 신경 쓰는 마족이 어째서 인간인 내게 마계로 간단히 들어가는 입구를 가르쳐 주느냐고는 물을 수 없었다.
괜시리 물어봤다가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해버려도 곤란하니까.
한순간 함정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는 이내 그 가능성을 완전히 지웠다. 근거는 전혀 없었지만 바로아 씨는 그럴 사... 아니, 마족이 아닐 거라는 감 때문이었다.

"...비가 그친 모양이군."

키르셰가 잠시 생각의 늪에 빠져 있는 사이, 바로아가 바깥을 살피며 말했다.
과연, 그 소리를 듣고 보니 확실히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바로아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은 우중충했고,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진다 해도 믿어버릴 만큼 잿빛 분자들이 떠돌고 있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인간들에겐 별로 좋은 날씨가 아니니, 바로 귀가하는 게 좋을 거다. 노파심에서 말해두겠지만, 절대 흥미 위주로 들어가 볼 생각은 마라. 알겠나?"

바로아는 키르셰가 고개를 세로로 흔들 때까지 그녀를 주시하고는 이내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사이를 두고, 키르셰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릴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아는 분명 경고했지만 미지에 대한 동경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키르셰는 혹여 라도 근처에 바로아가 있지는 않은지 살짝 살피며 그가 가르쳐 준 오두막집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