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사스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마법석.
나는 작은 마력이 내뿜는 오묘한 빛에 완전히 마음을 뺏겨버렸다.
혹여나 내가 갖고 도망칠까 싶었는지 선생님께서는 내게서 마법석을 나꿔채 금고에 도로 넣어버리셨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쩝쩝 입맛을 다셨다.
어떡해서든 손에 넣고 싶었지만, 마을에서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이야기 뿐.
선생님을 구슬려 어떻게든 시가를 알아봤지만... 도저히 일개 평민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어떡한담...

-1445년 8월 14일, 마리 스톨맨의 일기장에서

 

 


키르셰는 요즈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9월부터 1달 내내 열리는 수확제가 어느 새 성큼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제에서 꼭 우승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며 키르셰는 주제를 바꿔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냈다.
풍경화, 종교화, 정물화, 인물화...
큐브는 어느 것이든 훌륭하다며 칭찬을 쏟아냈지만 키르셰는 탐탁지 않았다.
니엘 교수로부터 교양이론을 가르치는 강사로 채용된 이후 그림에서는 거의 손을 놓았기 때문에 예술을 표현하는 감각이 무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물화가 좋겠어."

키르셰는 지금 막 완성한 자화상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나 큐브에게 보여주면 십중팔구 이 그림으로 하라고 추천할 만큼 훌륭했지만, 키르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자화상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예술가들끼리 서로의 작품을 품평하는 아트 홀 전시회라면 몰라도, 지금 키르셰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몰리뉴 왕국의 수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출품자의 실력이지만, 심사위원의 취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었다.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분명 심사위원의 취향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테니까.
정물이나 자화상은 상대적으로 그리기 쉽지만 특별한 개성을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자화상은 자칫 잘못하면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점수가 깎일 우려도 있었다.
인물화로 할 거라면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모델을 찾는 것이 유리할 것 같은데...

"음..."

키르셰는 침대에 드러누워 깍지를 꼈다. 무엇을 그리면 좋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곰 인형이 있었다면 의견이라도 구해보겠지만 아버지께 빼앗겨버렸으니.

"그 사람으로 해 볼까..."

무심코 떠오른 사람이 있었지만 키르셰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좋은 작품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만... 혹여라도 그림을 제출했을 때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 것은 곤란하다.
게다가 바로아는 마족.
같은 마족인 큐브가 그림을 본다면 단박에 알아볼 것이고, 그러면 얘기가 꼬이게 된다.
그 뿐이면 다행이지만, 혹여나 심사위원이나 수확제 실행위원에게 그 사실이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승을 노리기는커녕 이단으로 몰려 즉결처분의 대상이 될지도.

"역시 안 되겠지... 그럼..."

키르셰는 다음 후보를 떠올렸다.
몇 달 전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초상화 한 폭. 잠시나마 키르셰의 마음을 빼앗았던 수려한 그림체.
아니, 안 돼. 역시 그것도 안 되겠어.
그림을 찾아냈을 때 아버지께서 보였던 태도로 봤을 때, 그림 그려보겠다고 빌려달라고 해봤자 안 된다는 말밖에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고,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려봤자 모작밖에 되지 못한다.

"아우, 주제 정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 뭐 괜찮은 거 없을까... 아!"

머리를 긁적이던 키르셰는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떠올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 대중성도 있고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물.
이번 예술제의 심사위원은 분명 톰스 사교님과 에바 수녀님, 론발드 백작님이라 하셨지.
그렇다면 이 인물을 그리면 분명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야.
키르셰는 재빨리 스케치북으로 달려가 개와 고양이가 엉켜 싸우는 낙서를 끄적인 종이를 찢어내고 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필을 꺼내들었다.

"키르셰, 안에 있니?"

한창 그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노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들이 달려들었다.

"혹시 예술제에 낼 그림 그리던 중이었어? 열심이네."

청록색으로 물들인 마리의 원피스와 크리스티나의 상아빛 실크 드레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똑같은 스케치를 몇 장이나... 어머, 흠뻑 젖었잖아요!"

크리스티나는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집어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응, 날이 너무 더워서..."

키르셰는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한여름인 8월. 몰리뉴 왕국 전역을 강타했던 뇌우는 어느 새 자취를 감췄고, 잠시 물러났던 태양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8월 중에서도 유난히 무더운 날이었으므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스케치를 하느라 팔을 움직일 때면 가끔 땀이 흘러내려 종이를 적시기도 했다.
키르셰는 땀으로 그림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더운 날임에도 이것저것 신경 쓴 탓에 몇 곱절은 더 더워 보였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번에는 그림을 망치지 않고 무사히 스케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너흰 어때? 수확제 준비 잘 돼가?"

이렇게 푹푹 찌는 날에 색칠까지는 도저히 무리다. 8월이 가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나중에 더위가 한 풀 꺾이면 마저 완성하자며 연필을 내려놓았다.
한 숨 돌릴 겸 묻자 마리와 크리스티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난 벌써 끝내 놨지! 엘프의 고목이라는 그림이야. 얼마 전 아빠랑 같이 동부 수풀지대에 가서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굉장하더라구. 마침 수확제랑 겹치기도 해서 바로 그려버렸지 뭐야."

"전 이번 댄스대회를 위해 새 드레스와 구두를 맞췄어요. 보나마나 이번에도 반드시 우승할 게 틀림없으니 두고 보라니까요."

"키르셰는? 뭐 그리고 있었어?"

마리가 고개를 숙여 완성된 스케치를 들여다보았다.

"어, 이거... 광장의 분수 앞에 있는 동상 아냐?"

"네? 코끼리 동상을 모델로 삼았다구요?"

"아니, 그거 말고 그 옆에. 몰리뉴 왕국을 구한 영웅의 동상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스칼렛 티타니아 리파인. 맞아, 그 사람을 모델로 한 거야."

키르셰가 말을 받았다.

"인물화를 그리기로 했는데 마땅한 모델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자화상을 그리긴 좀 그렇잖아. 그런데 너희가 이 시간에는 웬일이야?"

키르셰는 혹시나 그림이 망가질까 싶어 얇은 무명천으로 캔버스를 덮어 한쪽으로 치웠다.
마리는 기다렸다는 듯 게슴츠레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키르셰 너, 내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응. 근데 그게 왜?"

"지금에야말로 그 소원을 쓸 때가 온 거야! 나랑 크리스티나가 어딜 좀 가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가자고 하려구."

키르셰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냥 놀러 가자는 것도 아니고, 소원 얘기까지 하는 걸로 봐선 놀러 가자는 곳이 평범한 곳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기분 나쁠 정도로 싱글거리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디로 가려는 건데?"

"마법석을 캐러 마계로 가는 거야!"

설마 또 다크타운에 가자는 건 아니겠지. 떨며 떨며 묻자 기다렸다는 듯 마리와 크리스티나가 동시에 합창을 했다.

"......."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줄 알았다...는 건 오바고.
키르셰는 잠시 동안 눈을 깜박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냄비에 불 올려놓은 걸 깜박했네. 얼른 가서 꺼야겠다."

"국어책 읽듯이 빠져나가려 해봤자 소용없어, 키르셰 틴시클!"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마리의 손이 키르셰의 머리카락을 죽 잡아당겼다.

"너 저번에 분명히 약속했었다? 알바 대타 뛰어주는 대신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들어 줄게 있고 없는 게 있는 거야! 마계에 들어가겠다니, 니들 제정신이니?!"

키르셰는 마리의 손을 뿌리치고 목소리를 높였다.

"크리스티나, 너 예전에 다크타운에서 있었던 일은 벌써 잊어버렸어?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이젠 다크타운도 모자라 마계에 가시겠다? 귀족 아가씨의 체면이란 걸 좀 더 생각하라고!"

어쩐지 자기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이렇게 말하면 조금은 반성하지 않을까 했지만,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너무해요, 키르셰. 먼저 말을 꺼낸 건 마리예요. 난 그냥 얘기를 들으면서 맞장구치며 부추기기만 했을 뿐이라고요."

"더 나쁘잖아!"

"자자, 키르셰. 너무 흥분하면 몸에 해로워. 사정 설명을 해 줄 테니까 진정하고 앉아 봐. 얘기를 들으면 너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야."

"...좋아."

키르셰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두 친구들도 침대 가장자리를 각자 차지해 앉았고, 마리가 주섬주섬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나르사스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마법석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
마을에서 도는 마법석은 너무나도 부족한데다 그마저도 턱없이 비싸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는 것.
최근에 이르러서야 마법석을 구하려면 직접 마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

"때마침 크리스티나가 일반 백성의 생활상을 체험해보고 싶다면서 알바를 하겠다고 찾아왔지 뭐야. 그래서 가게가 한산한 틈을 이용해 이 얘기를 했더니 흥미가 동했는지 함께 가고 싶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같이 널 찾아온 거야. 어때? 이제 좀 이해가 가?"

"전혀."

키르셰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뭐가 얘기를 들으면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이 철없는 아가씨야.

"어째서 소녀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키르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소녀의 로망이란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려한 보석과 값비싼 드레스, 호화로운 결혼식이나 날 데려가 줄 왕자님 같은 거잖아! 적어도 한창 전쟁 중인 적진에 숨어들어가 돌멩이 따위를 찾는 게 소녀의 로망일 리는 없어!"

키르셰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언성을 높였다.
뭐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마법석이란 것에 호기심이 없지는 않다.
그치만 그 호기심은 있으면 좋겠다 정도지, 마계에 잠입하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을 만큼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뭐, 다른 데 흥미가 있어 마계를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그건 그거고.

"훗, 키르셰 당신도 생각이 어리군요."

크리스티나가 자신만만하게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칼을 쳐냈다.

"평범한 소녀들은 분명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처럼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레이디에게는 보다 자극적인 게 필요한 법이라구요. 게다가 인간들은 각자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피차 취향은 존중해 줘야죠."

자기 취향을 고집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멋대로 남을 끌어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식으로 설득해 봤자 서로 평행선을 달릴 뿐... 아, 그래!
순간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너희들... 마계로 가는 건 그렇다 치고 거기까지 어떻게 갈 건데? 말해두는데 타마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마계의 입구로 알려진 지저의 동굴까지 가는 데만도 도보로 열흘은 족히 걸릴 거야. 동굴을 빠져나오는 건 별개의 문제고, 마계까지 간다 쳐도 마법석은 어떻게 찾으려고?"

친구들이 잠깐 입을 다문 틈을 타 키르셰는 의기양양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는 것도 아니고, 그 동안 집에는 뭐라고 얘기할래? 여행 준비도 해야 할 거고, 부모님께도 허락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전에 약속한 게 있으니 마리가 정 원한다면 따라가 줄 순 있지만, 내가 말한 것들은 다 해결하고서 부탁하는 거겠지?"

바로아가 자신에게만 알려 준 입구를 떠올림과 동시에 키르셰는 정상적(?)으로 마계에 드나드는 것은 상당히 만만찮다는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아가 마계의 입구를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자신이 최초로 제기한 의문이기도 했다.
마리나 크리스티나는 키르셰 본인처럼 어느 정도 자신을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얘기하면 분명 포기할...

"걱정 마! 그 점은 다 생각해 뒀어!"

...리가 없었다.
마리는 손뼉을 치며 크리스티나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것보다 너 방금 네 입으로 말했다? 니가 말한 거 다 해결하면 같이 가겠다고!"

"그럼 더 기다릴 거 없어요! 얼른 짐 챙겨서 출발하죠!"

"......"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키르셰는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항복 의사를 표했다.

"알았어, 알았다구. 약속을 했으니 따라는 갈게... 근데 대체 어떻게 하려고?"

"아, 그 전에 하나 준비할 게 있어."

"준비할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