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화살처럼 빨리 지난다...
이리하여 8년간의 세월이 꿈같이 지나갔다...
8년 전, 불안한 기색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작은 소녀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냉정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생기를 잃었던 푸른 눈동자는 어느 새 윤기를 되찾아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뿌린다.
본연의 색을 잃지는 않을까 싶었던 나의 염려는 단순한 기우로 끝났다.
성인이 된 딸에게 축복을 빌어 주는 것만이 지금의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과연 딸이 잘 해낼 수 있을지 부모로서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뭐어, 딸을 믿는 수밖에.

 

 


"센티아 자매, 매번 이렇게 도와주러 와 줘서 고마워요.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곳을 꾸려나갈 수 없었을 거예요."

메리벨은 항상 봉사하러 고아원에 나와 주는 센티아 수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머, 도와주러 오다뇨. 가엾은 어린 천사들을 돌보는 건 신의 지팡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센티아 수녀는 신경 쓰지 말라며 막 세탁을 마친 빨랫감을 한 아름 들어올렸다.
메리벨 역시 읏차 하며 빨래가 가득 든 바구니를 양 손으로 들어올렸다.

"매일 아이들하고 같이 지내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을 요하죠?"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 빨랫줄에 막 세탁한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걸어 올리던 센티아가 불쑥 말을 던졌다.

"예, 뭐... 나름 각오하고 덤빈 일인데도 가끔씩 힘에 부칠 때가 있어요. 제 역량이 부족한 탓이겠죠..."

이제 막 사회에 나온 햇병아리니 어쩔 수 없다며 메리벨은 불쑥 혀를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요. 메리벨 씨는 분명 잘 해주고 있어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스팀슨 원장님을 대신해 고아원을 인수하시고, 아이들을 친 자식처럼 성심껏 돌보고 있잖아요. 아이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메리벨 씨를 진심으로 따르는 거구요."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좋을 텐데."

센티아가 말했다.

"그럼요. 세상에 찌든 어른들보다는 순수한 아이들이야말로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는 법이죠.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자신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지 아닌지 말이에요."

"다행이다."

메리벨은 살짝 어렸던 먹구름을 완전히 걷어내고 흡사 태양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 싹을 틔운 봄의 기운을 받아 헤엄치는 미풍이 메리벨의 머리칼을 장식한 붉은 리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혼자서 모든 걸 다하려 들지 말아요. 나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가끔씩 이지만 이 곳에 봉사하러 와 주시고. 힘들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도록 해요. 알겠죠?"

센티아는 텅 빈 빨래 바구니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제 막 사회에 나선 이 햇병아리는 의욕에 가득치 있다. 옆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 의욕은 분명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참,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시죠?"

센티아 수녀는 8년 전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몰리뉴 왕국을 구해낸 전직 용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 구국의 영웅 덕에 몰리뉴 왕국은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몰리뉴 왕국은 대체 무슨 업보가 꼈는지, 오래 전부터 줄곧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다.
그러나 왕국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오래 된 전승가에 나오는 패턴처럼 용사가 나타나 몰리뉴 왕국을 수렁에서 건져내곤 했다.
어쩌면 몰리뉴 왕국은 용사를 끌어 모으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는지도 모른다.

"아, 예. 아버지께서는 늘 건강하시죠. 실은... 얼마 전에 여행을 떠나셨어요."

"여행이요? 무사수행 같은 건가요? 이미 몰리뉴 최고의 실력가일 텐데, 굳이 그러실 필요는..."

"무사수행 같은 개념은 아니구요.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 곳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용병이셨어요. 우연히 몰리뉴 왕국과 인연을 맺고 이 곳에 정착하여 저를 거두어 주셨지만... 아버지께서는 항상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셨거든요."

메리벨은 어딘가 아련한 시선을 담아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그대로 느끼며 메리벨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상처 치료와 저 때문에 마을에 머무르셨지만, 이젠 저도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아버지께서도 자유를 누리실 권리가 생기신 셈이죠. 아, 너무 걱정 마세요."

메리벨은 살짝 불안한 기색을 드리우는 조력자를 향해 휙휙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그 때는 당신이 본 세상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시겠다고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혹여나..."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폰 망트이펠 경이나 마크 레스터 등 훌륭한 후임들이 있으니 설사 몰리뉴 왕국이 다시 위험에 처하더라도 문제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이지만, 몰리뉴 왕국은 당분간 무사할 것 같은데요."

"예,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런데 메리벨 양. 혹시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메리벨은 무슨 소리냐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한 쌍의 푸른 호수가 궁금증에 매달려 묘한 표정을 자아냈다.

"오늘 고아원에 아이 한 명이 새로 들어온다는 소식 말이죠."

"그래요? 금시초문인데... 어떤 아이죠? 어쩌다 부모를 잃은 거죠?"

센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이 의욕만 넘치는 아가씨는 분명 화를 내겠지.

"이름은 카르멘이라고 해요. 조금 있으면 소테가 데리고 올 텐데... 기왕 말 꺼낸 김에 지금 얘기하는 편이 좋겠군요."

센티아는 알맞게 햇빛이 들어 적당히 따뜻한 잔디밭을 가리켰다.
메리벨은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싶어 얌전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8년 전 있었던 전쟁에 대해선 잘 아시죠? 메리벨 양도 그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은 피해자였으니까."

그 전쟁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며 센티아는 쓸쓸한 웃음을 흘렸다.

"예, 그래요. 하지만... 그 덕이라고 해야 할 지... 저는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죠."

"카르멘도 메리벨 양과 똑같은 처지에요. 그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은 가엾은 아이죠."

"그럼 그 때부터 지금까지는 어떻게 지내온 거죠?"

센티아는 이야기보따리를 풀듯 천천히 사정을 설명했다.
카르멘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는 것.
전쟁 통에 그녀의 부모님은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는 것.
아직 갓난아기였던 그녀는 친척에게 맡겨졌지만, 친척들은 카르멘을 내놓은 아이 취급하며 학대에 가깝도록 방치해 왔다는 것.
차라리 성당이나 고아원에서 맡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법률상 친권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게도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런데 얼마 전.
겨울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불쌍한 아이는 얇은 모슬린 원피스만을 걸친 채 성당 문 앞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죽었나 싶어 아이를 발견한 소테 수녀가 깜짝 놀라 아이를 안으로 데려갔고, 다행히도 따뜻한 곳에 뉘어 주자 아이는 곧 정신을 차렸단다.
아이에게서 들은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여기저기 돈을 꾸어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던 친척들은 돈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싣고 야반도주를 했다고 한다. 아이만을 남겨둔 채로.

"뭐라고요?!"

예상대로.
이야기를 듣던 메리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쌍의 푸른 호수가 분노로 일렁였다.

"어떻게 아이를 그렇게 학대할 수가 있죠? 그 사람들... 정말 인간 맞는 거예요?"

너무 열 받은 나머지 메리벨은 발을 동동 굴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신을 거두어 친딸처럼 보살핀 자신의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단 맡았으면 최소한으로라도 돌봐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뭐? 방치? 학대?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메리벨 씨."

"네?"

메리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대체 뭐가 낫다는 거야?

"종전 직후, 손쉽게 돈을 벌기 위해 자기 발로 이상한 여관으로 들어간 여자들이 몇몇 있다는 건 알고 있죠?"

"그야 뭐... 설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메리벨은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에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리벨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센티아는 고개를 세로로 흔들었다.

"아이에게서 나온 진술이기는 했지만... 어린 아이가 지어내기에는 묘하게 세세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냥 해 보는 말이었는지, 아이가 나이가 차면 보낼 요량이었는지 이제 와서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아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정말 다행이라며 센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을 살면서 가끔씩 조우하는 인간의 추악한 면에는 죽어도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익숙해진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되겠지만.

"그 아이 지금 어딨어요? 아니, 소테 씨는 언제 데려오는 거래요?"

메리벨이 물었다.

"지금이 세 시니까 이제 곧 도착할 거라고... 어머,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말이 꼭 맞네요."

성당에서 정확히 세 번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현재의 시간을 가늠하여 대꾸하던 센티아는 고아원의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가락을 따라 메리벨도 시선을 돌렸다.
푸른 수녀복을 입은 센티아의 후배가 허름한 원피스를 걸친 한 소녀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이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아이의 페르소나를 보고 있자니, 메리벨은 마치 8년 전의 자신과 마주하는 듯 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아마, 자신도 양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자면 줄곧 저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고아원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심하던 메리벨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 아이는 또 하나의 나였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막 아버지를 만났을 때와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나서야 할지는 이미 정해진 것 아닌가.
8년 전, 처음 만난 아버지께서 나를 대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이 아이를 마주하면 될 거야.
메리벨은 8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쿵쾅쿵쾅.
긴장의 늪에 빠져 고동치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메리벨은 소테 수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들어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